맑은 초가을, 햇살은 해실 거리고 바람 또한 살랑이며 내 곁을 지나간다. 수다스러운 작은 산새들은 나무에 앉아서도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고 산둘레길 입구에 심겨 있는 꽃들도 나비들을 영접하느라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몸치장하기 바쁘다. 이제 꽃들도 나비들의 날갯짓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산둘레길로 들어가기 전에 한적한 정자에 앉아본다. 아무도 말을 거는 이가 없어도 정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약수터에서 새어 나오는 물 흐르는 소리뿐이다. '졸졸졸졸', 제법 리듬감이 있다. 그 소리가 뭐라고 사람의 마음을 집중시키고, 취하게 까지 한다. 물 흐르는 소리에 취했다는 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잠시 나른한 몽상에 젖어 있다 보면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정자는 순식간에 고요함을 밀어내고 모여드는 사람들의 생기를 단번에 받아들인다. 나도 살짝 엉덩이를 들썩여 내 옆에 앉으려고 하는 낯 모를 사람에게 곁을 내주며 짧게 눈을 맞추고 그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제 말없는 정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을 준비를 한다. 그가 이곳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면도날 같이 날 선 이른 봄바람, 달팽이 껍데기라도 녹일 듯한 무더위, 그리고 그 매서운 동장군의 기세를 다 견디며 오랜 세월을 서 있는 것은 자신에게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자가 내주는 의자에 앉아서 각자가 지닌 얘기를 풀어놓을 시간이다. 산둘레 길을 오며 가며 서로에게 익은 듯, 익지 않은 얼굴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생경스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중 내가 아는 동네 지인의 얼굴이라도 섞이면 나도 그런 느낌이 없다. 어쨌든 여기 모인 사람들의 말잔치에 참여하려면 생경스러운 감정 따위는 애초에 집에 두고 와야 한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스럽게 금남의 장소가 된다.
모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쟁여 놓았던 내밀한 한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제법 연세가 지긋한 아주머니의 비밀스러운 얘기를 듣고도 아무도 놀라지 않고 같이 한숨을 쉬고 탄식을 내뿜는다. 말없이 듣고 있던 사람들도 그에 상응하는 스토리들을 하나하나 털어놓는다. 한동안 정자 안에 공감이 물 흐르 듯 흐른다.
이렇게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듯 비슷비슷한 대화들이 오고 가다가 그 말들 사이에 때론 탄성과 웃음꽃이 피어나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아 그만 슬며시 일어나 산속 둘레길로 행한다. 그곳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려면 나도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쯤 풀어놓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다.
많은 얘기들을 들었지만 사실 그다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여기로 이사 온 지 이제 만 8년이 되었지만 내겐 이 동네에 특별한 친구가 없다. 그저 마주치면 서로 목례를 하고 영국인들의 첫 대화가 그러하듯이 날씨 이야기나 주고받는 사이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참 묘하다. 뭐니 뭐니 해도 구경 중에 사람 구경이 최고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아무 쓸데없는 얘기라도 듣고, 사람 얼굴이라도 마주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내 기분에 분명 차이가 있다.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도 말이다. 산입구에 있는 마을 정자가 아니라면 내가 그나마 사람냄새를 맡을 기회가 가끔이라도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인사 한번 하면서 서로 웃는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좋은 게 아닌가 싶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의식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여기서는 굳이 친한 사람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어차피 내 속을 다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이렇게 해가 있을 때 정자로 나오면 언제나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도 들을 수 있고 가끔 나도 그 대화에 끼여서 웃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삶의 심오한 철학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비슷한 삶의 철학을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의견이 오가다 자칫하면 친구 사이에 부딪혀 척을 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가끔은 가볍게 알고 있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드는 것도 괜찮다. 정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 가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마음속에 고인 말들은 글로 털어내면 되지 않겠는가!
대도시에서 눌러살았으면 더 외로울 뻔했다.
사람냄새도 제대로 못 맡고 살 뻔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면서 사는 경우가 부지기수 인 게 도시의 삶이 아닌가. 물론 제 하기에 달렸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 말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이곳에선 언제라도 부대낌 없이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이곳으로 이사오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