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모기, 그리고 불면의 밤

by 해진

밤새워 비가 오나 보다.

이렇게 질리게 오는 건 봄비가 아니야. 정원의 꽃들도 다 졌는데 이 비가 무슨 소용이람.


땅이 젖을 만큼 젖었을 텐데 비 좀 그만 오지. 끊임없이 추적대는 소리에 잠 못 이루니 심술보가 있는 대로 더해졌다. 게다가 철 모르는 모기 한 마리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내 몸에 세균이 득시글거리는 빨대를 꽂으려 저공비행을 하고 있으니, 미련 곰탱이가 아닌 다음에야 어디 제대로 잠이 오겠는가.
안 그래도 각성 호르몬 과다증으로 고통받아 온 세월이 얼만데, 어디 이놈의 모기 잡히기만 해 봐라. 요절을 내고 말 것이야. 막 잠자리에 들었다가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아무리 여기저기 수색해 봐도 놈은 간 곳이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다. 당연하다. 세상에 어느 모기가 자기 목숨이 달렸는데 이렇게 단단히 벼르고 있는 사람 앞에 쉽게 나타나겠는가.
에프킬라 병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자비를 베풀어 오늘 밤은 살려두기로 했다. 내일 다시 출몰하지 않는다면 일단 녀석의 목숨은 보전된 셈이다. 제철도 아닌데 물려봤자 후유증도 미미할 것이고, 아직 말라리아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뉴스는 못 들었기에 살려두기로 용단(?)을 내린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다. 오늘 밤도 잠들기는 다 글렀다. 단념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창밖에 봄비는 지칠 줄 모르는데, 이 비 그치면 봄은 이미 저만치 물러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빗소리도 좀 전에 자리에 누워서 듣던 것과는 사뭇 달리 들린다. 그 추적대는 소리가 오히려 정겹다. 너무 정겨워서 슬프다.
"봄은 겨울 속에서 꾸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더니 이 봄도 지난봄같이 꿈처럼 지나가려나. "이미 봄이면 내 마음속의 봄은 떠나는 봄이다."라더니, 사랑의 절정에 이별을 예감하고 슬퍼하는 연인의 마음으로 또 그렇게 미리 봄을 보내야 하나 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흐르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 힘겹게 숨 쉬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봄이 간다는 것은 날마다 미명에 깨어나 새 이슬로 단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이 너무나 힘겨운 꽃들이 제풀에 지쳐 그 화려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여린 잎과 꽃망울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살금살금 소리 없이 내리던 봄비가 더 이상 조심스러워질 이유가 사라지자 하늘 어디에 있는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예쁜 꽃들 사이사이에 머물러 있던 봄바람도 이제는 스러진 꽃들 곁에서 살랑거릴 이유가 없어지니, 다른 아름다운 꽃들을 찾아 멀리 길을 떠나가는 것이다.
오늘 밤 나를 잠 못 들게 한 봄비야, 추적거린다고 핀잔을 줘서 미안하구나. 밤새도록 마음껏 내리려무나. 나같이 무딘 필력을 가진 사람은 때로는 불면의 밤을 거쳐야 졸작 하나라도 더 건지게 된다는 것을 네가 깨닫게 해 주었구나. 그리고 모기야, 이제 난 불을 끄고 그만 자려한다. 내 통통한 팔을 내줄 테니 거기다 너의 빨대를 꽂고 마음껏 만찬을 즐기렴.

j-waye-covington-rBJ-aOZqrEk-unsplash.jpg Photo by J'Waye Covingt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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