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멀리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전쟁이 발발한 후 턱수염이 자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유럽 정상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옛날 나치에게 단치히를 양보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순진한 태도 때문에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2014년에 유럽이 러시아에게 너그러운 제스처를 취한 탓에 이 전쟁이 발발한 거라고 말했다. 당시 독일 총리였던 메르켈과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가 뜨끔할 말이었다.
미국 의회와 유럽 의회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각성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남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쟁이며, 우크라이나인이 죽는 건 곧 유럽인이 죽는 거라는 위기를 느꼈다. 그들은 러시아 가스가 끊기는 재앙을 각오하고 ‘유럽의 방패’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각자의 국방비를 올리기로 결정했으며 스웨덴과 핀란드는 서둘러 나토 가입을 진행했다.
푸틴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겨울날 가스가 끊겨 한 점의 온기도 없이 덜덜 떠는 유럽을 상상했을까? 그래서 유럽이 뒷걸음질 치는 걸 기대했을까? 나토가 동진을 멈추는 걸 상상했을까? 이번 힘자랑으로 푸틴은 무엇을 얻었나? 우크라이나 땅 네 조각과 러시아 국민의 지지율을 얻었다.
하지만 득보다 실이 컸다.
나토에서 멀어지고자 했던 의도와는 정반대로 갔다. 우크라이나, 스웨덴, 핀란드가 파란 깃발에 더 가까워졌다. 심지어 한국과 일본이 나토 회의에 참석하는 꼴까지 봤다. 트럼프가 국방비를 올리라고 닦달해도 꼼짝 않던 ‘잠자는 사자’ 독일은 재무장 선언을 했다. 신난 건 미국이었다. 무기와 석유를 사줄 고객(유럽)을 확보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푸틴이 미국에 유럽을 선물한 것 같았다.
다시 냉전이 시작됐다.
나토와 우크라이나가 ‘잠자는 곰’ 러시아를 자극해서인지, 과거 소련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차르’ 푸틴의 야심 때문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포탄은 우크라이나에 떨어졌고, 그 포탄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포탄 소리는 서방세력(유럽-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철창이 내려간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장벽 이후 다시 또 다른 벽이 세워진 것이다.
이른바 ‘신냉전’.
세상은 세계화 시대와는 다른 색조를 띠게 되었다. 신냉전은 그 옛날처럼 세력이 갈라지고, 마피아처럼 동맹을 갈라치고, 무역을 끊고, 땅을 따먹고, ‘핵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광경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