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와 아니무스

혐오주의자를 혐오함

by 청년홈즈

분석심리학의 개척자로 부르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이론 중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이 있다. 아니마(anima)는 남성성 속에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은 여성적 측면을 말하고, 아니무스(animus)는 여성성 속에 자리 잡은 남성적인 면을 말한다. ‘아니마’는 배려, 치유, 용서, 공유하는 것이 본질이고, 아니무스는 지배, 독점, 승리, 소유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특이한 점은 남성은 하나의 ‘아니마’ 밖에 가지지 않는데, 여성은 복수의 ‘아니무스’를 가진다는 점이다. 워낙 심리학 문외한인 자라 깊게는 모르겠으나 하튼 내가 아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은 이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남성 혐오니 여성 혐오니 하는 말들이 돌아다니며 사회갈등 요소가 되고 있다. 사회 불평등적인 원인을 성적인 측면으로만 보려는데 있다. 원인이 단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이유에 있지 않을 텐데 덮어 놓고 이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한다. 대부분 불평등과 폭력의 원인들은 남성이나 여성때문이라기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 훨씬 많다.


물론 남성을 혐오하는 일부 여성들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구조가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인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들이 마치 자신의 권리인양 여성을 무시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한 면으로 전체를 진단하고 대상을 정해 혐오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종갓집에서 자란 나 또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이 들어 있을 게다. 나름대로 걷어 내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으나 여전히 그 찌꺼기들이 남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일부 여성들의 혐오 대상이 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주 평화주의자인 나는 이런 혐오주의자들을 만날 때 참으로 안타깝다. 융의 이론대로라면 어차피 우리 내면의 무의식 속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이 두 개의 성적 측면이 같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일부 혐오주의자들이 덮어 놓고 이성을 혐오하는 일은 자신의 내면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를 보며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부터인가 살면서 안 하던 어떤 일들을 하며 좋을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작은 것들에 감동하며 넉넉해진 나를 발견한다. 나이 먹어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융이 말했던 내 안에 잠자던 ‘아니마’가 자라는 신호일 게다. 언제부터인가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언제부터인가 밖에 나가면 등이 넓어진 아내 뒤에 숨곤 한다. 아내 속에 잠자던 ‘아니무스’가 깨어나는 중일 게다. 이리 생각하니 신은 참 신묘한 균형 주의자다. 양 성을 주었으면서 그 안에 상대편 성을 감춰 두었으니.


젊은 시절 내 남성 성으로 남성 중심적인 이 사회에서 잘난 체하며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뒤에 숨어서 눈치껏 살아야겠다. 아 이런 발상도 어쩌면 혐오주의자 눈에는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싶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서로 혐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융의 말대로라면 내 안에는 어차피 두 성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아니마’와 ‘아니무스’ 잘 들여다보며 살자. 세상의 평화와, 지구의 평화와, 우주 평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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