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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Mar 01. 2024

세계는 지금, K 소주에 취하다.

짝퉁 소주라니.    한글로 쓰여있는 데 한국 술이 아니라고?

'오징어 게임' 속 소주가 등장하는 장면

 “What's that green bottle?” (저 초록색 병은 뭐야?)

그러잖아도 영어 울렁증이 있는데 먼 나라 술집에서 뜬금없이 날아온 영어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돌아보니 갈색 머리에 눈, 코가 눈에 꽉 차는 청년이었다. 

“Me?” “Why?” 

머릿속을 방황하는 알량한 English를 총동원하여 모깃소리를 내니 청년이 미소로 고개를 까딱한다. 얼떨결에 나도 미소를 보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청년은 벽면 쪽 TV를 가리켰다. 화면 속에는 이름이 가물가물한 어느 중년의 한국 배우가 허름한 술집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제 본 듯도 한 드라마인데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하! 그린 보틀?”  

소주: 한국인의 대중주


라오스 방비엥에서 있었던 일이다. 방비엥의 밤거리를 구경하고 싶어 초저녁 여행자들이 북적이는 술집에 들었는데 K-드라마 때문에 이방인 청년과 하룻밤 친구가 되었다. 갈색 머리 청년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으며 연신 싱글벙글 들떠 있었다. 내 행색만 보고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다. 조금 흐트러진 청년 모습에 마음이 편해졌다. 워낙 좁은 술집이라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안토니오였다. 스페인 친구인데도 영어를 나보다 훨씬 잘하는 것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술의 힘을 빌려 당당하게 몸짓언어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안토니오는 ‘K-팝’ 팬이라고 했다. K-드라마도 즐겨 보는데 초록병의 실체가 궁금하다는 거였다. 한국 술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저 술이 어떤 술이기에 드라마 한 편마다 한 번 이상은 꼭 등장하냐는 것이었다. 

“Is that green bottle a Korean soulmate?” (저 초록병이 한국인의 솔메이트야)

대충 이런 질문이었던 것 같다. 


안토니오 말을 듣고 보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K-드라마에 소주병이 엄청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모든 영화, 드라마 심지어 뮤직비디오 속에도 등장하는 초록병의 정체가 외국인들 눈에는 궁금할 만했다. 생각해 보니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던 오징어 게임 속에서도 초록병이 등장했었다.


조금 취기가 오른 나는 더 대담한 콩글리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소주를 무척 사랑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연애할 때나 헤어질 때나 상갓집에서나 결혼식장에서나 그린 보틀(초록병)은 항상 한국인과 함께한다. 소주는 곧 한국인의 솔메이트다.’ 안토니오는 내 콩글리시를 다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내 열정에 감복했는지 한국에 가면 반드시 한번 마셔보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 분명히 꼭 연락하겠다고 도장 찍고 복사까지 했는데 안토니오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안토니오’는 손흥민 고생시켰던 콘테 감독과 같은 이름이었네. ‘안토니오!’ 혹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꼭 연락해라. ‘그래 나야 나, BH’ 

지역별 대표 소주

소주는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가성비 좋은 대중주다. 잠시 호텔경영학을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수업은 다 땡땡이를 쳤어도 술에 대해 배우는 수업은 빠진 적이 없었다. 그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 세계 술을 마셔봤는데 소주만큼 싸고 좋은 대중주는 없더라. 이렇게 괜찮은 소주를 마실 수 있는 한국인은 축복받은 것이다’

여행자 흉내를 내며 몇 나라 술을 섭렵하다 보니 교수님 말처럼 소주가 지천인 한국은 술꾼들에게 축복인 나라가 맞는 것 같다. 그나저나 소주 값이 자꾸 올라서 걱정이다.


원래 소주는 고려 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전통주로 쌀, 밀, 보리 등을 원료로 발효시킨 후 증류하여 만든 술이다. 이렇게 증류한 원액 소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소주보다 도수가 높아 30, 40도, 50도 등으로 출시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초록병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희석식’이라는 표현 때문에 화학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희석식은 알코올 도수를 적정하게 조절하기 위해 물을 섞었다는 표현이다. 희석식 소주는 쌀, 보리, 고구마 등 곡물 원료로 주정을 만들어 물과 희석하고 여기에 감미료 등 여러 인공첨가물을 첨가하여 만든 대중주다.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지금이야 대부분 소주가 16.5도지만 이전에는 25도로 독한 술이었다. 1998년 참이슬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3도 소주를 출시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주류회사들의 도수 낮추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도수를 낮추면서도 소주 본연의 목 넘김과 맛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였다. 살아남기 위해 주류회사들은 품질 향상 경쟁에 사활을 걸었다. K 소주는 지금의 전 세계 최고로 많이 마시는 증류주가 되었다. 영국 주류전문매체 ‘드링크 인터내셔널(Drink Internationals)’은 2021년 발표에서 21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는 하이트 진로라고 밝혔다. 하이트 진로는 2021년 한 해 동안만 무려 9450만 상자(상자당 9리터 기준)를 판매해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지금 K 소주에 취해 있다.

건배: K소주가 아니다. 태국, 캄보디아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한국산이 아니라 현지술이다.

K 소주 인기는 K-컬처 바람을 타고 더욱 치솟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짝 인기를 끌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순하리’ ‘자몽에 이슬’ 등 과일소주들이 동남아를 비롯 미주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동남아에서는 이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짝퉁 과일소주 출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2022년 10월 17일 자 뉴데일리경제 보도에 따르면 태국, 캄보디아에서 판매되고 있는 ‘건배’의 경우 우리 소주 병과 똑같이 생긴 360ml 그린보틀(초록병)에 한글로 상표가 붙어 있어 한국인도 구분하기 힘들다. 제품 종류도 15% 소주 제품부터 ‘건배 프레시 12%’ ‘복숭아, 그레이프프루트, 젤리, 요거트 등 각종 과일향 소주가 출시되었다. 태국의 또 다른 짝퉁 ‘태양’ ‘나르바나 하이’, 필리핀의 ‘오빠 OPPA’, 인도네시아 ‘대박’ ‘참좋은’, 미얀마의 ‘자연 THE JAYEON SOJU’, 캄보디아 ‘김김KIMKIM 소주’ 등 동남아에는 지금 과일향 소주 짝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에 대만까지 합류하여 짐루(JIMLU) ‘금이슬’ ‘오빠 주세요 Oppa JuseYo’ 등을 출시하였다고 하니 K 소주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K-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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