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를 넘어 K류로
‘첫 등장 순간 한복을 입고 관객 앞에서 한국의 유산에 경의를 표했다’
미국 CNN에 올라왔던 블랙핑크 코첼라 공연후기다. 2023년 4월 15일과 22일, 북미 최대 뮤직 페스티벌 코첼라 헤드라이너는 ‘블랙핑크’였다. 무대에 오른 ‘블랙핑크’는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대형 기와지붕 한옥세트에 한복 디자인 철릭을 입고 한국어 노래를 불렀다. 공연을 즐긴 사람은 대략 일일기준 현장 관객 12만 5천여 명, 실시간 스트리밍 2억 5천만 명이 시청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세계 팝의 주류무대에 보여준 K팝의 당당한 위상이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발견)는 K-콘텐츠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류의 생활패턴이 바뀌자 많은 직장인은 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생활에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비대면 활동, 비대면 서비스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극장, 공연장 등이 주무대였던 문화 콘텐츠들은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OTT(Over The Top) 플랫폼 시대가 열린 것이다.
2021년 9월, ‘오징어 게임’이라는 신선한 드라마 한 편이 글로벌 OTT플랫폼 넷플릭스를 타고 전 세계를 열광시키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극장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이 독특한 드라마 한 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온라인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Flixpatrol) 기준으로 ‘오징어 게임’은 무려 53일 동안 전 세계 1위 자리를 지켰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이전까지 좀비 드라마 ‘킹덤‘이 K드라마의 존재감을 알렸다면 오징어 게임’은 세계인을 K드라마의 세계로 빨아들이며 K콘텐츠의 우수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수리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더 글로리’ ‘사냥개들’ ‘무빙’ 등으로 꾸준하게 글로벌 흥행을 이어오면서 이제 K드라마는 세계인이 믿고 찾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오징어 게임이 드라마 부분의 K콘텐츠를 알린 일등공신이라면 K팝 분야에서는 단연 BTS를 꼽을 수 있다. BTS의 인기는 아미(ARMY)라는 강력한 팬클럽을 지원군 삼아 콘서트가 자유롭지 못했던 코로나 시국에서도 오히려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만 해도 서구권에서는 K콘텐츠에 대해 금방 시들어 버릴 반짝 유행이라는 시각이 주류였다. 특히 독일 매체들은 K팝에 대해 과할 정도로 깎아내렸다. 2018년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에 실린 K콘텐츠 비평기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불과 3년 후 이 매체에는 전혀 다른 논조의 K콘텐츠 기사를 올린다. 같은 매체의 시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K팝 그룹은 공장에서 찍어낸 가수들이며 뮤직비디오는 이미지 과잉에 아티스트는 노예계약에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은 단지 인권을 무시한 하드 트레이닝의 결과물일 뿐이다.’ (2018년)
'K팝과 기생충 그리고 가장 최근의 오징어 게임, 지옥 같은 넷플릭스 히트작, 한국은 광대한 크리에이티브 파워를 갖고 있다.’ (2021년)
이제 K콘텐츠 바람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 여전히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시기 질투를 받고 있지만 K에 빠져드는 문화의 흐름은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않았던 빌보드 차트 1위 소식이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군입대 전 BTS 멤버 지민과 정국은 각각 솔로 앨범으로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했다. 이뿐인가 이제는 많은 K팝 그룹들은 데뷔와 거의 동시에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다.
K팝,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고 따라 하는 종합예술로
이제 K팝의 세계적 인기에 대해 놀라워하는 뉴스는 진부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 K팝은 그리 대우를 받지 못했다. 팝의 주류시장에서는 K팝 가수들을 ‘팩토리 아이돌(factory idol)’이라 부르는 잠시 반짝하는 이질적인 비주류 문화 현상쯤으로 무시당했다. 하지만 이제 K팝은 세계가 인정하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어떤 힘이었을까?
전문가들의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중음악평론가 김영대 씨의 주장이 가장 와닿는다. 김영대 평론가는 K팝의 장점으로 다양한 요소들이 매력적으로 섞여 있는 ‘무근본 무맥락의 미학이다’라고 말하며 K팝 속에 들어 있는 3가지 특징을 설명한다.
첫 번째, 독특한 집단 창작 시스템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정착시킨 송 캠프(Song Camp)가 대표적인 예이다. 송 캠프란 국적 불문 댄스, 랩,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앨범을 완성시키는 협업 제작 시스템이다. 여러 창작자들 서로 작업 파일을 공유하며 회사 관계 부서의 평가와 의견을 반영하고 나아가 회사 수뇌부의 최종 의사를 반영하여 한 곡을 만들어 낸다.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주는 혁신적인 집단 창작 프로듀싱 시스템(Producing System)이다.
두 번째, K팝에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신선한 퍼포먼스(Performance)가 들어 있다. K팝 하면 떠오르는 말이 ‘칼군무’다. 빠른 비트의 음악이 주를 이루는 K팝은 곡에 맞는 안무를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세계적 안무가까지 참여시키며 최고의 안무를 짜고, 데뷔 전부터 피나는 연습으로 칼군무를 완성시킨다. 여기에 의상, 헤어, 메이크업까지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담아 뮤직비디오 제작에서부터 무대공연에까지 통일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칼군무와 세계관을 담은 전체적인 코디는 K팝을 하나의 장르로 격상시켰다.
세 번째, K팝은 노래 한 곡에 몽땅 집어넣은 맥시멀리즘(Maximalism)적인 음악이다. K팝은 어느 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힙합부터 레게, 발라드 등 다양한 형식과 세계관을 담은 칼군무, 의상, 메이크업까지 다양한 요소를 잘 버무려 만든 음악이다. 한마디로 K팝은 듣기만 하던 음악을 보고, 듣고, 함께 따라 하는 종합예술로 탄생시켰다. 무엇이든 들여와 우리 것과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독보적 혼종 문화 창조자인 K 족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K 문화 콘텐츠라 할 수 있다.
K팝 하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강력한 팬덤 문화다. 지난해 발매한 스트레이 키즈 3집 앨범은 초동이 461만 장 판매되었다고 한다. 초동이란 독특한 K팝 팬덤 문화로 앨범 발매 첫 주 동안 판매량을 말한다. 세븐틴의 미니 10집 앨범은 초동 포함 두 달 만에 620만 장이나 판매되었다고 한다. 음원 스트리밍 시대에 앨범 판매량이 이 정도라니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이러한 K팝의 강력한 팬덤 문화는 초동 문화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아이돌을 위한 투표 문화, 조공, 내 새끼 문화 등으로 나타난다. 조공이란 간단한 선물이나 전복, 장어 등의 초호화 도시락(조공 도시락, 촬영장에 밥차 등을 총알(돈)을 모아 보내는 것을 말한다. 밥차나 커피 트럭은 일하는 스태프와 동료들에게 ‘우리 스타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조공은 진화를 거듭하여 선행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공연장에 쌀 포대가 쌓이고, 공연장 근처 헌혈차에 줄이 늘어선다. 스타 이름으로 기부하거나 선행을 행함으로 지지하는 스타의 이미지를 더욱 좋게 해 주기 위해서다.
각종 경연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부터 등장하는 ‘내 새끼 팬덤 문화’는 ‘내 새끼 내가 키운다’는 문화로 스타가 되기 전 단계부터 스타가 될 때까지 가족처럼 지원하고 움직인다. 특히 가요 순위 프로그램이나 경연 프로그램에서 순위를 올리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표하는 이른바 총공은 K팝 팬덤 문화의 진수다. BTS의 팬클럽 아미(ARMY)가 BTS를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벌인 ‘총공’은 팬덤 이상의 뭉클함을 준다. 당시 아미들은 미국 점수 집계에서 가장 취약했던 라디오 방송 횟수를 올리기 위해 조직적으로 곡을 신청하고 사연을 보내 방송 횟수를 늘렸다고 한다.
이러한 K팝 팬덤 문화들은 그간 열광하며 추종만 했던 스타와의 관계를 나와 소통하는 친밀한 관계로 이끌었다. 특히 K팝의 주요 소비 층인 청소년 팬들은 성장기 찾아오는 자신의 정체성 고민을 또래 집단 및 스타와 공유하며 충성심이 깊어졌고, 국경을 넘어 연대하며 전 지구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K팝 문화 확산의 큰 이유 중 하나다.
K팝은 단순히 작곡가나 가수의 국적을 말하는 게 아니다. K팝은 가수를 만드는 시스템, 언어를 비롯 팬들과 소통하는 방식, 음악을 만들고 비주얼화하는 방식 등을 포함한 한국이 만들어낸 독특한 음악 장르다. 일본 아이돌 그룹 탄도소년단(BTZ)은 데뷔 후 바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시선을 끌었으나 방탄소년단(BTS)의 표절 그룹, K팝 짝퉁 그룹이라며 팬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스스로 K팝 아이돌을 내세우며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며 등장한 미국인으로만 구성된 ‘EXP EDITION(이엑스피에디션/소속사는 한국의 아임어비비)’은 팬들의 큰 사랑은 받지 못했다. 반면 한국인이 없는 K팝 걸그룹 블랙스완의 성공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들은 한국인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K팝 그룹이라 소개하며 한국어로 인사하고 한국어 가사로 노래를 부른다. 해외 팬들도 그들을 한국인이 없어도 K팝 그룹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한국에서 K팝 아이돌 육성 시스템 속에 연습생 시기를 겪으며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K팝은 그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적은 문화 장르라는 말이다.
수출 효자 종목 K콘텐츠
문화 장르로서의 K팝 위상뿐만 아니라 산업으로서의 K팝도 급성장하고 있다. K팝은 이제 하나의 자랑스러운 K-문화 수출품이다. 최근 K팝 음반 수출액 추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음반 수출액은 2018년 0.64억 달러(약 830억), 2020년 1.36억 달러(약 1760억), 2022년 2.33억 달러(약 3천억)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스트리밍 음원 청취 시대에 음반 판매라니 믿기지 않는 성과다. 이미 사양산업 취급을 받는 음반시장에서 유일하게 한국 시장만 음반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저 신기한 K팝 현상이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부분은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이 비즈니스 마인드가 너무 부각되어 팬들을 돈벌이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그룹 하이브가 발표한 공연 티켓 경매 방식 판매 제도인 ‘다이내믹 프라이싱(티켓 가격 변동제)’ 확대와 독자적인 팬 플랫폼 ‘위버스’의 유료화 플랜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국내 한 아이돌 그룹 해외 공연에서 판매한 비싼 응원봉 문제가 도마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물들어 올 때 노 젓자는 심보로 팬들을 봉으로 아는 단편적인 시각은 잘못된 마케팅이다. 다른 산업과 달리 팬들이 떠난 K팝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이처럼 K팝과 같은 콘텐츠 산업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하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콘텐츠 수출은 연관 효과가 더 큰 분야로 수출 1억 달러 증가할 때마다 화장품, 가공식품, 패션, IT 기기 등 관련 소비재 수출은 1억 8천만 달러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빌보트 핫(Hot) 100 차트 1위를 차지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제적 파급 효과는 무려 1조 7천억에 이를 것이라는 문화체육관광부 분석 자료가 있다. 이는 직접적인 음반판매, 음원 및 공연, 지식재산(IP-Intellectual Property), 기타 수입 등 이외에 화장품, 식료품, 의류 등 연관 소비재의 수출액 증가 및 국가 브랜드에 미친 영향까지 포함한 결과이다.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K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이미 2022년 130억 달러(한화 약 17조 7천억 원)를 넘겨 2차 전지(99억 9천만 달러), 가전(80억 5천만 달러), 전기차(98억 2천만 달러)를 뛰어 남었다고 한다.
이러한 K콘텐츠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보완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넷플릭스가 오징어게임으로 거둬드린 수익은 2021년 10월 기준으로 무려 약 8억 9천만 달러(약 1조 5백억)로 추정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 대한 IP(지식재산권)는 넷플릭스에 있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으로 파생된 관련 상품 판매 등에 대한 판권은 국내 제작사가 갖지 못한다. 오징어게임은 일종의 매절계약 형태로 계약했기 때문에 제작비의 110% 외에 별도의 인센티브는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별도의 인센티브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시즌2 제작이나 해외 리메이크 판권도 넷플릭스 몫이라 하니 뭔가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IP(지식재산권) 확보를 위한 관련법 보완이 시급하다.
사실 K콘텐츠 바람은 K팝, 드라마, 영화에서만 부는 것이 아니다. 클래식 분야에서도 임윤찬과 같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수년에 걸쳐 국제콩쿠르 우승을 휩쓸며 K클래식의 위상을 높이고 있으며, 만화를 모바일 세계로 끌어들인 한국이 만든 콘텐츠 K웹툰은 이미 세계시장을 장악했고, 세계적 스타 페이커 이상혁을 보유한 e스포츠의 힘 그리고 게임산업도 세계적 수준이다. 이러한 K콘텐츠의 바람은 그동안 반도체, 가전, 자동차 등으로 인식되었던 K를 K팝, K드라마, K영화 등 한국을 콘텐츠의 나라로 인식시키기 시작했다. K콘텐츠의 바람은 이제 시작이며 향후 수십 년은 지속될 것이라 확신한다. K콘텐츠가 미래먹거리 산업이고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