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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elyn H Jan 23. 2024

필요하다면, 저항을!

저처럼 극소심한 사람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어떤 이미지로 떠올릴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꽤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직장 입사 전까지는요. 

가끔 엉뚱한 짓을 하기는 해도 큰 틀에서 보면, 학교든 회사에서든 소위 '룰'을 위반한다거나,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슬아슬한(?) 일들을 벌여 '이슈'를 만드는 일 따위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란 이야깁니다만)

그런 제가, 심지어 늦깎이 회사원이 된 주제에,
조직 문화나 팀의 분위기에 반기를 들 수 없었겠지요. 

날 때부터 순종적 기질이 DNA에 아로 새겨져 있었기에, 소요를 일으키거나 개혁적 조치를 취하자고 선동하는 그런 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조금 이상(정확히는 불합리)하다고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어떤 분은 '뭘 이런 별 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은...' 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요.  


잠시, 라떼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볼게요.  

처음 입사를 하면 아직 능력이 충분치 않으니, 부득이 자료 정리 같은 난이도 '하'의 업무부터 익히게 됩니다. 이건 전혀 이상할 게 없지요. 

그런데, 과거부터 굳어져 온 관행처럼, 본업과는 조금 동떨어진 소위 '허드렛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가령 외부 손님이 방문하시면 취향을 묻고 차를 내온다든가(지금처럼 테이크 아웃을 하는게 아니고, 탕비실에서 찻잔에 담아내고, 서빙, 설거지까지...), 아침마다 부서장님이 구독하시는 조간 신문을 종류별로 챙겨드리는 일, 팀원들 우편물 수취/정리도 저와 비서분의 몫이었습니다.    

전임자도 퇴사하면서 별 말 없이 인수인계를 했기에, 처음엔 단순히 해야 할 일인가보다 생각했지요.


하지만, 차츰 '이건 이상하다'는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업의 특성상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소속 팀 역시 스태프 부서라 해도 여성 직원은 희박했습니다. 저와 임원분의 비서 정도였지요. 

요즘은 그런 일이 여간해선 없지만 예전에는 대리급 이하 여직원은 팀 내 여러가지 소소한 일을 맡아 하면서, (남성)팀원들을 내조(?)해야 한다는, 암묵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곳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어제까지 군말없이 하던 일을 오늘부터는 안(못)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생뚱맞은 일이고, 그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도 모르겠더군요.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서장님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경조사를 챙겨야 했는데, 모든 팀원이 장례식장을 가서 가족처럼 상을 함께 치렀습니다. 방문객을 맞고, 음식과 술을 가져다 드리고, 신발을 정리하고... 

거기까진 참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린 후배한테 했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기도 했지만요)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3일장을 마친 다음 날 아침. 같은 팀 A대리가 저에게 와서 몇 개의 봉투 묶음을 내밀었습니다. 

부서장님 측 손님들의 부의금을 엑셀로 정리하라는 '지시'와 함께요. 

"제가요? 왜요?" 즉시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A대리는 질문에 대답이 아닌 반문으로 기함하게 했습니다. "OO씨는 이걸 왜 안하려는 건데?"

둘 사이의 긴장된 대치 상태가 5분 이상 계속되었지만, 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선례가 만들어지면, 유사한 일은 반복되게 마련이고 무엇보다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전혀 납득되지 않았으니까요.  

A대리는 저를 설득할 수도, 기를 꺾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상무님 비서분에게 요청 아닌 요청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조직에서 나쁜 인간이 되었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을 (비서분에게)느꼈고요. 


그 일이 잠잠해지는 듯하던 어느 팀 회의 시간,
구석에 앉아 있던 저는 돌연 선언했습니다.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소소한 '팀 케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여직원'이라서는 아닙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당분간 하되, 앞으로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새 직원이 들어오면 바로 인수인계 하겠습니다."

 

잔잔한 파문이 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뒤에서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야말로 '전통'을 파괴하는 선언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그 이후, 구태의연한 조직 문화에 대한 시대적 반성때문인지, 저의 작은 외침이 나름 힘을 받았는지 무의미한 심부름이 줄긴 줄더군요. 



회사를 퇴사하고 난 몇 년 후. 당시 저에 대한 그 분들의 평가를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되었습니다. 

"OO씨가 그 때 일은 참 야무지게 잘 했지." 하더랍니다. 

결국은 크든 작든 본연의 업무로 평가받게 됩니다. 안해도 되는 허드레일이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에 굴복했다면, 그래서 '프로 허드레 케어러'로 포지셔닝했다면, 어땠을까요.

저는 이직 후부터 고생은 좀 했지만 좀 더 의미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성과를 내면서,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돕는 나름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므로 지금 세태엔 맞지 않겠지만 굳이 꺼내는 것은, 앞으로 일을 해 나가면서 비합리적이라고 결론내린 일에 대해서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어린 직원일수록 조직의 암묵적 룰과 분위기에 압도되고,
'아니오'하기 쉽지 않다는 것, 잘 압니다. 

그래도 무조건적인 NO가 아니라, '이유있는 반항'이라면 시도해볼만 하지 않나요? 

물론 불이익 받지 않도록 분위기 잘 살펴서요. 모든 것은 자신의 결정이고 책임이니까요. 

(그렇다고 직장에서 무턱대고 투사가 되시라는 이야기가 아닌 거, 아시죠?) 

솔직히 저는 겁도 많고 현명한 '네고시에이터'는 아니었던지라, 영리한 솔루션을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최소한 제 일의 범위와 의미를 타인에게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정리한 '셀프 포지셔너'였다고 생각해요. 

혹시 커리어를 잘 쌓고 싶다면, 적어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현황'과 미래 '성장' 가능성을 꼼꼼하게 따져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 그 용기는 낼 만 했네요. 후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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