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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와레몬나무 Sep 02. 2019

끝이 있을까

끝이 없는 일은 없다. 사람의 일생도 끝이 있고 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에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들이 떠나던 날부터 나의 불행은 끝이 없었다. 사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인생에서 아니 나의 가족에게 고통은 더이상 없을것 같았다. 어미가 새끼를 잃는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은 가족단위가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주어진 몫이 있는것 같다. 

 2015년 5월,

수술을 앞두고 남편이 한국으로 왔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는 날부터 보조 침대에서 골아떨어졌다. 나의 침대를 내주고 싶을만큼 곤하게 잤다. 

알부페이라(Albufeira in Algarve)

 거동이 자유로워 지자, 나는 남편한테 건강검진을 권유했다. 포르투갈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시간이 날지도 모르고, 한국만큼 의료시스템이 좋은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는 남편을 대신해서 내가 가기로 했다. 그런데 결과지를 받기 전에 또 전화가 왔다.


"남편분 건강검진 결과 양쪽 갑상선에 제법 큰 혹이 보입니다. 상급병원에서 진료를......"


당황스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소견서를 들고 내분비과를 찾았다. 의사는 좀 더 자세한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남편한테 사실대로 말했다. 그도 검진할 때 의사한테 들은바가 있는지 놀라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 아들을 잃을때도, 내시경과 수술을 할때만 해도 자식잃은 어미가 받아야 되는 형벌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까지 종양이 있다니......나의 전생은 망나니 였던가! 아니면 나를 구원할 예수는 내게로 오다가 길을 잃었던가! 나는 짚을 잔뜩 실은 마차를 타고 불구덩이로 질주하는 것 같았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 어째서 내게는 몇년 사이에 한꺼번에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오히러 치병에 전념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의료진행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느려서 남편과 통화를 하다보면 속이 터질 정도였다. 전화로 얘기하는 것 보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여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사실 내가 간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지만, 가족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수술을 집도했던 외과의사가 보조적 항암치료가 필요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원할 때 천정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퇴원하는 날, 혈액종양과 의사는 "방사선 25회와 항암주사 6회"를 처방했다. 수술을 마친 암환자는 퇴원할때부터 형액종양과의 진료를 받고, 향후 건강검진도 이곳에서 담당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직장내 신경내분비암은 십만명 중의 한명이 걸릴만큼 희귀했기때문에 일반 직장암 환자들에 비해서 데이타가 많지 않고 의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때서야 수술에서 떼 낸 직장을 집도의한테 기증한 것이 생각났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암환자를 치료하는데 미국의 처치방법을 따른다. 하지만 의사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혈액종양과 의사는 나의 경우 신경내분비암이긴 하지만 직장에 생겼기 때문에 직장암 환자의 일반적인 매뉴얼을 따른다고 했다. 

며칠을 고민해도 답을 찾을수 없었다. 부족한 처치보다는 과잉처방이 위험도가 적을것 같았다. 건강검진, 내시경 시술, 직장암 수술까지 했는데 항암치료도 못할것 없었다. 그러나 방사선치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사흘동안

전형저인 포르투갈 바닷가모습, 멀리 보이는 식당 루지타나는 포르투갈을 지칭하는 옛이름

항암주사를 맞았다. 이전의 모든 처치는 방사선 치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첫 1주일은 표가 나지않고 견딜만했다. 그러나 2주가 지나자 몸이 늘어지기 시작하고, 짧아진 직장때문에 화장실을 실시간으로 드나들었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사이 체중도 빠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아들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것 같은 일이 치병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자신보다는 소중한 것이 없는지 오직 치병에만 몰두했다.' 어미라고 하는자가 이래도 될까?' 잊혀졌던 문제가 무겁게 억눌렀다. 

 화장실을 다니느라 날밤을 새우다가, 나는 문득 신이 두려워졌다. 

포르투갈 속담에 사지가 잘린 사람이야기가 있다. 그의 행실이 옳지 않았던지 친구가 그러면 되겠나 신을 무서워해야지 라고 충고하자 그는 " 신이 내게서 더이상 뭘 가져갈 수 있겠나! 이번에 머리카락을 뽑아 갈건가?"

 신이 다음에는 무엇을 앗아갈까라는 생각은 딸아이로 연결되자 등골이 오싹했다. 비록 나의 것은 뺏길수 있어도 딸아이는 지키고 싶엇다.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신존재를 나는 화풀이 대상이라도 있어야하기에 그를 원망하고 악다구니를 썼다. 신을 만난다면 한판 크게 붙었을텐데 딸아이가 어른거리자 나는 납작하게 엎드릴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인을 믿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나약했다.

 지루하던 방사선 25회와 마지막 사흘동안 또 항암주사를 맞았다. 항암주사 4회가 더 남았다. 방사선 시작과 끝무렵에는 사흘씩 맞는 것이 1회지만 앞으로 남은 4회는 방식이 좀 달랐다.즉, 1주일에 5일 맞는 것이 1회였다. 그러니까 4주동안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나는 혼자서 견딜수 없을것 같아서 의사와 의논하여 포르투갈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내가 맞는 주사제는 암환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이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는 그곳 의사의 권유대로 항암주사는 맞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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