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황치훈 1집 - 1988
숨은 K-Pop 명곡 전체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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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발 조금만 더!
부탁이야!
뜨거운 여름의 공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상쾌함으로 살갗 위를 간지럽히는 때가 오면 서서히 우린 가을이 문턱에 가까이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루종일 내리쬐는 햇볕과 열기에 온몸이 지쳐있던 우리에게, 가을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갑작스러운 백허그와도 같다. 은근슬쩍 '쓰윽' 옆구리를 통과하는 가을의 바람은 뭐라 딱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흐뭇함과 안도, 그리고 설렘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점점 병들어 아파하는 지구 때문인지, 요즘의 우리 시대 가을은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무심한 나그네와 같이 변해 버려서, 그를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흔히 가을을 낭만의 계절 혹은 남자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시기에 많은 남성들은 나도 모르는 센치함이 밀려와 그동안 내 머릿속 어딘가 꼭꼭 숨겨놓았던, 아니 이미 지워버렸다고 생각한, 어질어질한 추억과 사랑의 파편들이 무차별로 소환되기도 한다.
이전 여행 관련 이야기에서 포스팅하기도 했지만, 가을에 특히 남자가 센치해 지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데, 남성의 경우 일조량이 부족해지는 가을이면 비타민D 합성이 줄어들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 또한 줄고, 우울감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ScienceTimes 기사 참조)
그냥 떠나버려?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도 길지 않은 가을을 즐기는 굉장히 훌륭한 방법이다.
https://brunch.co.kr/@bynue/68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가을은 모든 아티스트나 프로듀서에게 훌륭한 소재로 사용되어 왔고, 이를 이야기하는 노래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누구에게나 가을이면 생각나는 최애곡 한두 개쯤은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곡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오늘 소개할 예순한 번째 숨은 명곡은 요즘과 같은 가을에 듣기 좋은, 1988년 발매된 황치훈 1집에 수록된 황치훈 작사, 윤상 작곡의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이다.
1971년 생인 그는 무려 3살인 1974년, 아역 배우로서 연예계에 입문하고 1976년 KBS '황희정승'에서 황희의 아들로 열연하며 주목을 받았고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MBC 호랑이 선생님에 출연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고교생 일기',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 '전원일기' 등의 드라마, '팔불출', '울지 않는 호랑이', '우정의 햇살' 등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음악적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애니메이션 '헤클제클'(1981)의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고, '안녕 E.T.'(1983)라는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끊임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의 결과물로 1988년 데뷔앨범이자 오늘 소개할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가 수록된 1집을 발매하게 된다.
황치훈 1집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는 명반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이나 프로듀서들의 이름만으로도 이 앨범의 내공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명반일 수밖에 없는 앨범!
ARRANGED : 송홍섭, 함춘호, 김종진
BASS GUITAR : 송홍섭, 김현규
RHYTHM & LEAD GUITAR : 이병우 , 박청귀, 김종진, 최희선
ACOUSTIC GUITAR : 함춘호, 이병우, 김종진
ACOUSTIC PIANO : 김효국
DRUMS : 김희연, 장태경, 전태관
PERCUSSION : 김희연, 이건태, 전태관
KET BOARD : 김효국, 이종욱, 홍종화, 이관형
SAXES : 이정식
우선 작곡가부터 살펴보면, 국내 최고 기타리스트인 함춘호, 블루스계의 신 이정선, 당시 가장 Hot했던 작곡가였던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그리고 떠오르는 신예 윤상 등 어마어마한 프로듀서들이 참여했고, 편곡자로는 송홍섭이 함춘호, 김종진 등의 작곡가들과 함께했다.
이외에 세션을 맡은 뮤지션들도 어마어마하긴 마찬가지인데, 기타에 이병우, 김종진, 박청귀, 베이스에 송홍섭, 드럼에 김희연, 전태관, 건반에 김효국, 색소폰에 이정식 등 당시 최고의 레전드들이 모두 이 앨범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앨범에 수록된 윤상 작사/작곡의 '추억 속의 그대'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이듬해인 1989년 황치훈은 KBS 신인가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다. 그 해 남녀 신인상 후보와 노래를 살펴보면 얼마나 그 경쟁이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남자는 김상아, 여자는 조갑경이 차지했다.
▲남자 신인가수상=이상우(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이규석(기차와 소나무), 이정현(그 누구보다 더), 김상아(사랑했어요), 황치훈(추억 속의 그대)
▲여자 신인가수상=조갑경(바보 같은 미소) 안혜지(벌써 이 밤이 다 지나고) 김혜림(D D D) 원준희(사랑은 유리 같은 것) 신효범(사랑을 누가).
이후 황치훈은 1991년 그룹 마로니에의 멤버로 2집 '안개꽃 꽃말은 슬픔', '이별뒤의 모습', '혼자 남는 법', '뜨거운 바람이 되어 네 곁에 다가서리' 등의 4곡을 불렀고, 1992년에는 김현철, 윤상, 한경훈(빛과 소금), 송홍섭 등이 참여한, 또 하나의 숨은 명반이라 불리는 2집을 발매했으며, 1996년에는 시청률 65.8%의 경이로운 기록을 가진 전 국민의 드라마 '첫사랑'의 OST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중에게 1집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음악활동은 1998년 3집으로 되돌아 가는데, 아쉽게도 이 또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그는 이후 생활고 등을 겪으며 연예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는 2005년 자동차 판매원으로 자리 잡게 되지만, 2007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고, 오랜 투병생활 끝에 안타깝게도 2017년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황치훈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슬로우 템포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시작부터 마음을 울리는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뭐 하나 아쉽지 않은 편곡과 연주로 듣는 내내 가을이라는 계절의 쓸쓸함을 잘 전달해 주는데, 황치훈 특유의 마음을 움직이는 목소리, 윤상만의 서정적 멜로디가 함께 어울려 마치 낙엽이 흩어지는 노을길 어딘가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바쁜 일상에 치여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오늘만을 사는 우리.
옛 기억에 잠시 빠지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지는 요즘, 갑자기 '훅'들어와 내 마음속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추억 때문에 하염없이 센치해 지거나 우울해진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자.
원래 가을은 이런 상실의 재발견을 즐기는,
비참하도록 아름다운 그런 계절이니까.
작사 : 황치훈
작곡 : 윤상
편곡 : 송홍섭
노래 : 황치훈
높은 하늘이 말을 하듯이 아직 하루해는 길기만 한데
기다림에 지쳐 그리움에 지쳐 무겁기만 한 이 마음
조용히 눈을 감으면 잊혀진 새벽이 나를 감싸고
지나간 추억들은 하나둘 떠올라 난 그리움에 잠기네
아 가을은 깊어만 가고 그대 모습 볼 수가 없어
나는 이제 또다시 어디로 가야만 하나
떨어지는 지친 낙엽처럼 내 마음 흩어져 버리고
저 물드는 노을을 보며 이젠 내 발길을 돌리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