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정원영 : 3집 Young Mi Robinson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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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자!
더 이상은 못하겠어.
지금은 좀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수십 년 전 군대를 갓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푸릇푸릇한 후배 여학우들과의 만남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던 젊은 시절의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예쁜 후배와 사귀게 되어 꿈에 그리던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주변에 숨겼기에, 우린 한동안 캠퍼스 안에서 나름 짜릿하고 긴장감이 철철 넘치는 비밀 연애를 하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작은 '스타트 업'을 창업했을 때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의 만남의 주기나 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녀의 한숨과 짜증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결국 어느새부터인가 우린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을 넘기 시작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이젠 아무렇지 않게 내뱉게 된 거다.
개인적으로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좋지 않은 상태는 아마도 헤어짐을 일상화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마치 습관처럼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그 끝은 불을 보듯 뻔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날도 그랬다. 몇 시간 동안이나 좁혀지지 않는 서로 물고 뜯는 지옥 같은 싸움에 지쳐버릴 대로 지쳐버린 나를 보며 그녀는 또다시 헤어지자 했고, 매번 무슨 소리냐며 왜 그리 쉽게 말하냐며 되레 화를 내왔던 나는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당황해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예전처럼 그녀를 다시 잡아주리라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화를 내게 내며 울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조용히 일어나 카페의 문을 열고 나왔다.
마음이 쓰라리고 허전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는 이상한 쾌감이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었고 얼마동안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십 분을 그대로 거리를 힘껏 뛰었던 것 같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이 도시의 늦은 저녁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조금씩 마르기 시작할 무렵, 잠시 멈춰 턱까지 올라온 숨을 깊게 뱉어냈다. 그녀와의 지긋지긋했던 연애의 기억도 모두 뱉어낸 듯 했다.
'그냥' 가슴이
후련했다.
오늘 소개할 백마흔다섯번째 숨은 명곡은 1998년에 발표된 정원영 3집 'Young Mi Robinson'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영 작사/작곡/편곡의 '그냥'이라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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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은 지난 숨은 명곡 시리즈에서만 4번째 다루는 국내 프로듀서이자 아티스트로, 송홍섭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던 '어느 날 오후', '3류 음악가의...', 자신의 1집에 수록되어 낯선 사람들과 함께한 '흐린 날, 텅 빈 하늘', 그리고 국내 최고의 퓨전 펑크의 그룹 'GIGS'의 앨범까지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더 이상 '숨은'이라 이야기하기 민망할 정도가 되어버린 레전드가 아닐까 싶다.
정원영은 1993년 솔로로 데뷔해 1집 '가버린 날들' 앨범을 발매한 이후 비교적 최근인 2021년 8집 '별'까지 총 8개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고, 이외에 그룹 'GIGS'와 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 '정원영 밴드'의 리더로 꾸준히 그의 음악적 역량과 열정을 우리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오늘 소개할 정원영의 노래 '그냥'은 두렵기만 했던 관계의 집착에서 벗어나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혼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자유를 노래한 곡으로 제목도 쿨하기 그지없는 '그냥'이다.
참고로 이 곡이 수록된 정원영 3집 제목인 'Young Mi Robinson'가 뜻하는 바는 '이름은 영미, 성은 로빈슨'인 가상의 미국 입양아를 표현한 것으로 앨범 커버에는 벨기에 입양인으로 유명 아티스트인 미희 나탈리 르므완의 그림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앨범은 한상원, 이적, 정재일, 이상민, 강호정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이 세션으로 참여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는데, 이 앨범에서 호흡을 맞춘 이들은 이후 'GIGS'라는 그룹을 결성해 또 다른 레전드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니 어쩌면 정원영 3집은 GIGS의 전초 앨범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빠른 비트의 퍼커션과 드럼으로 다소 긴장감 있게 시작되는 연주를 지나 언제인가부터 시티팝의 주류가 되어버린 리듬감 넘치는 멋진 브라스의 연주가 귓가를 스쳐간다.
마치 미국 GRP 계열의 퓨전재즈 밴드나 일본의 Casiopea, T-Square의 연주가 연상되듯, 이 노래를 구성하는 각 파트별 수준 높은 악기 연주와 '정원영'식 세련되고도 모던한 편곡이 곁들여져 가슴이 터져라 도시의 밤을 질주하며 환호성을 부르짖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
가끔은 묵혀왔던 이별이 잃어버렸던 자유와 삶의 기운을 줄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를 조금 더 성장하게도 한다.
그래! 이별하자.
작사 : 정원영
작곡 : 정원영
편곡 : 정원영
노래 : 정원영
날 떠난 거니 이젠 널 볼 수 없니
그래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끝
가끔 날 생각하니 언젠가 둘만의 비밀
가슴에 품어보던 우리 세상들
떠날꺼라면 왜 내게 왔니
하고 싶었던 너의 말을 해봐
보고 있잖아 너의 두 눈을
늘 내게 상처만 주던 그 눈을
그래 널 이해할께 또 다른 너만의 꿈
다만 기억해 니 자리는 이제 없는 거야
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
나 혼자 되버린 니마음 알 것 같아
그래 널 이해할께 또 다른 너만의 꿈
다만 기억해 니 자리는..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