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08] 전라남도 솔로 여행 : DAY 5, 하나
여행지는 목포, 진도를 중심으로 해남, 신안, 광주, 나주 등 전라남도의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기는 2021년 4월 말~5월 초에 떠났던 것으로, 현재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과 지역별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여행하였습니다.
여행지에서의 아침은 늘 변화무쌍하다.
어떤 날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천부당만부당 찌뿌둥한 날도 있고, 어떤 날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일찍 눈이 떠져 평소엔 꿈도 못 꿀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전날의 피로도와 오늘의 컨디션 그리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느낌 같은 느낌'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을 텐데, 어쨌거나 오늘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이른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오늘이 진도에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일 게다.
아침부터 방안 이리저리 펼쳐놓은 짐을 챙기고 다음 여행지인 해남으로 이동하기 위해 생각보다 이른 시간, 체크아웃을 했다. 사실 진도에서의 2일이라는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아쉬움이 너무나도 커서 숙소를 연장할까도 고민했지만 원래 생각대로 해남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잊지 말자.
솔로 여행에서의 긴 고민은
항상 뒤늦은 후회를 가져온다.
진도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진도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진도대교가 지나는 다리 아래의 바다는 그 이름도 유명한 명량해전의 '울돌목'이다.
창피하지만, 진정 몰랐었다.
그 유명한 울돌목이 여기였는지...
울돌목은 서해의 길목으로 해남과 진도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의 294m 내외라고 한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유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르고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소리가 크며,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인데 바다라기보다는 홍수진 강물로 보이며 물길이 소용돌이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내려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든다고 한다.(진도군 홈페이지)
보통의 경우라면, 진도에 들어오면서 '울돌목'과 '진도대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도타워'를 방문하게 되지만, 나는 무엇인지 모를 '사명감'으로 팽목항을 먼저 가야만 했었기에, 뒤늦게 진도를 떠나면서 이곳을 오게 되었다.
https://brunch.co.kr/@bynue/45
진도타워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이외에도 진도 주변의 아름다운 다도해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명량해전의 기록을 담은 전시실 등이 있는데, 30분~1시간 정도 소요되는 이곳은 꼭 방문해서 둘러보길 추천한다.
주차장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진도타워가 있는 정상으로 오르게 되면, 사방이 탁 트인 넓은 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 울돌목에서의 치열했던 전투 '명량해전'을 묘사하는 조각 작품들과 그 뒤로 보이는 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작은 다리를 연상하게 하는 양쪽으로 쭉 늘어진 광장의 전망대에 오르면 서/남해를 가로지르는 쌍둥이 진도대교에서부터 거센 물살이 휘몰아치는 울돌목, 그리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다도해의 모습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잠시 이곳 풍경이 주는 광활함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충무공과 진도 군민이 힘이 합쳐 이루어낸 대단했던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고 마치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용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래, 가슴을 넓게 펴자.
까짓 거 힘들어 봤자지 머!
진도 타워는 총 7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 로비와 특산물 판매실, 2층 진도 및 명량대첩 관련 전시실, 3층 카페, 4층 시네마, 5~6층 레스토랑, 7층 타워 전망대가 위치해 있다.
간단한 음료나 식사, 진도의 역사나 명량대첩 관련 전시를 둘러보기 위해서라면 1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타워 안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만약 7층 전망대가 궁금한 경우라면 광장에서의 조망으로도 충분하니 굳이 타워 전망대를 방문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번 남도여행에서 해남에 꼭 와야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100년의 역사를 품은 남도 한정식의 명가, '천일식당'의 떡갈비를 먹기 위해서였다.
이미 많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소개한 너무나도 유명한 곳이라, 별도로 어떤 설명을 곁들여야 좋을지 고민이 되긴 하지만, 이동에만 최소 반나절이 휘리릭 지나버리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오직 이곳의 음식을 먹기 위한 여행이라 할지라도 후회 없는, 그런 곳이라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까?
오직 이곳만을 위한 여행이라도
용서되는 그런 식당
천일식당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 개업하여 지금까지 한 자리에서 꾸준히 영업하고 있는, 국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식당이다. 개점 당시에는 '천일관'이 정확한 명칭이었는데, 이후 기생집 이름 같다는 이유로 '천일식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다.
예전 서울 역삼동에서 오랫동안 운영했었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근래 반포동에서 재개업 한 '해남 천일관'도 여기 천일식당과 그 뿌리가 같다. 가끔 서울의 '해남 천일관'을 이곳의 분점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 듯한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혀 다른 음식을 제공하는 별개의 식당이다.
우선 서울의 '해남 천일관'은 보다 고급 한정식을 추구하는 반면, 천일식당은 보다 서민적이고도 향토적인 메뉴를 제공한다. 당연히 두식당에서 제공하는 한정식의 음식 종류나 가지 수 등은 완전히 다른데, 천일식당의 대표 음식인 떡갈비만 하더라도 그 모양이나 플레이팅이 다르다.
두 식당의 맛을 비교하는 건 참 어렵고도 난감한 일인데, 서울의 '해남 천일관'은 '천일 식당'으로부터 시작된 다양한 음식들을 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쨌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회자된 강진의 '해태 식당', 인사동의 '영희네 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한정식 집으로도 불리는 이곳, '천일식당'에 생전 처음 방문하게 된 나는, 오늘 아침부터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에 들떠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풍겨오는 오랜 식당의 멋 때문이었을까, 오래된 골목 안 천일식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식당 앞에 몇 안 되는 공간에 주차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근처의 공영 주차장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입구를 지나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ㄷ'자 형태로 다수의 방이 붙어있는 한국 전통 가옥이 나타나는데, 우수영, 산이, 땅끝 등 이곳 지역의 이름을 붙인 방 이름들과 예전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 앉으니 직원분께서 주문을 받으러 오셨는데, 여전히 민폐 손님인 솔로 여행객의 사정을 소상히 설명드리고, 떡갈비 정식 1인분을 주문했다.
다행히, 코로나의 여파로 조금은 시들해진 손님 때문이었는지, 서울에서 멀리 이곳까지 온 여행객에 대한 측은함과 배려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흔쾌히 1인분 주문을 받아주셨다. 사실 1인분 주문이 안된다면 2인분을 시킬 생각도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음식의 맛을 보지 못한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대참사가 될 터이니...
잠시 방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오래된 한옥집 앞마당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을 보고 있노라니, 언제였는지도 모를 잊혀진 내 어린날 추억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오랫동안 가져왔던 꿈을 이룬 듯, 알 수 없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뒤로하고 정신없이 팔딱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일식당'의 떡갈비 정식 한상 차림을 맞이했다.
드디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르는, 20가지의 정성스러운 남도 음식이 한가득 차려진 천일 식당의 한정식 한상. 이미 미간은 찌푸려지고,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다소 아쉬웠던 점은 '천일 식당'의 다양한 젓갈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그것조차 영롱했던 떡갈비를 보니 사르르 눈꽃처럼 사라져 버렸다.
난 얇디얇은 내 인내심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떡갈비를 툭툭 잘라 입안으로 한 조각 가져다 넣었다.
이건 호불호가 있을 수 없는 음식,
마치 떡갈비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목포의 성 식당을 방문했을 때도 이야기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갈비'를 이야기할 때, 손바닥 만한 완자 형태의 부드러운 육질이 특징인 담양식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데, 이곳 천일식당의 떡갈비는 그보다는 넓고 평평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https://brunch.co.kr/@bynue/42 (목포의 성식당 떡갈비)
100년의 내공이 느껴지는, 떡갈비를 감싸고 있는 은근한 단맛과 특유의 간장의 풍미는, 굳이 밥을 곁들여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삼삼하고 담백했으며,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육즙 사이로 적당히 다져진 육질을 한 입 베어 물게 되면 마냥 부드럽지만 않은, 고기 씹는 식감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건 마치 담양과 목포 떡갈비의 균형을 맞춘 이유 있는 '타협'과도 같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었던 '파김치'!
이것만 먹으려 이곳에 들려도 용서가 될 만큼 맛있었던 파김치는 식사 내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의 모든 손님들이 연신 "좀 더 주세요~!"를 노래했다.
잘 익은 파김치를 올려먹는
육즙 팡팡 떡갈비를 참을 수 있다고?
모든 게 최고였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당연히 평이했던 반찬도, 내 맘에 쏙 들지 않았던 음식도 있었다. 다만 이 모든 게 용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천일식당의 떡갈비는 훌륭했고 마치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 어느새 텅텅 빈 밥상 위 그릇들을 보며, '아니 도대체 그 많던 음식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탄식했다.
서서히 오랜 웨이팅에 지친 손님들의 목소리들이 문밖으로부터 들려왔고, 혼자 독방 하나를 온전히 차지한 내가 괜스레 죄송스러워졌다. 아쉽지만 천일 식당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방을 나와 문간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데, 직원 한분이 깜짝 놀라 뛰어오셨다.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매실차 줄 테니 먹고 가요~! 소화에 좋아요~!"
마당 한켠에 앉아 남도의 정이 가득한 달달한 매실차를 마시니, 모든 게 완벽했고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뼈저리게 인생의 교훈이 느껴졌다.
100년 맛집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천일 식당을 나와, 소화도 될 겸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남의 또 다른 베이커리 맛집 '피낭시에'를 방문했는데 걷는 동안 자꾸만 매실차를 들고 달려오셨던 직원분이 생각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푸른 하늘색 빌딩에 멋진 필기체로 쓰여진 간판이 인상적인 '피낭시에'는 지역의 특산물인 고구마를 활용해 제품화에 성공한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고구마의 외형을 그대로 닮은 고구마빵은 일일 한정으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근래에는 해남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Must Have'로 구매한다고 한다.
기분 좋게 빵 한 상자를 테이크 아웃했고, 지금 이 순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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