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29일 차
스토너 교수님, 우선 진심 어린 경의부터 표하고 싶군요. 저는 불과 어제 당신을 친애하는 독자가 되었습니다. 담담하고 건조한 당신의 생애가 제게 어떠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만약 교수님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손아귀에 쥐지 못한 것들에 대한 열망, 결핍에서 오는 간절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책 속에 등장하는 당신은 미리 앞서 욕심내기보다 경험한 뒤에야 뒤늦게 본인이 갈구했단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았지만요. 그럼에도 저는 궁금합니다. 당신의 굴곡진 생에 대한 감각과 모든 의사 결정이 감히 저라면 생각지도, 행하지도 못할 방향이었으니까요. 저와 정반대 성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당신을 우러러보게 되는 건 제가 갖지 못한 면모에 대한 이 같은 경이로움이 동반되어서겠지요.
스토너, 당신 삶에는 세 명의 빌런이 있습니다. 바로 아내 이디스와 찰스워커, 그리고 로맥스 교수. 당신이 걸어가는 길 위에 그들이 검고 끈적끈적한 타르를 엎지른 것처럼 굴 때마다 저는 외연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당신이 신비로웠습니다. 그리고 나선 꽤 갑갑해졌죠. 저라면 당장 이디스와 이혼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딸 그레이스를 구출할 텐데. 이디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찰스워커와 로맥스 교수의 보복을 피해 다른 대학으로 옮겨서 새로운 미래를 도모할 텐데라고 말이에요.
고비마다 당신이 대처하는 방식은 제 기대와는 내내 끝까지 어긋났습니다. 그저 묵묵히 감내하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뿐이죠.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친 농사꾼 부모의 DNA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까요. 풍진 세상에서 당신이 두 발 딛고 살아갈 수 있던 버팀목은 인내와 평정심, 이 두 가지 덕목인 거 같아요.
하지만 맙소사,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마음속으로 감탄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디스의 이기적인 히스테리에 서재를 빼앗기고 일광욕실로 내쫓겼죠. 비로소 마음 깊숙이 간직해 온 순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느끼며 꾸몄던 바로 그 서재를 말입니다. 당신은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기쁨에 충만했고 딸 그레이스와 일상적이지만 평생토록 기억할 추억을 쌓았습니다. 서재의 짐들이 몽땅 퇴출되고 이디스의 작업실이 꾸려졌을 땐 하, 그녀의 이기심과 고약함에 혀를 내둘렀답니다. 이런 시련에도 당신은 생각합니다. 그레이스와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돼서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요. 어찌 그럴 수 있나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교수님처럼 덤덤한 듯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곁의 빌런 삼총사 같은 무리들이 제 인생에 등장해 앞길을 막는다면 저는 도저히 못 견디고 훌쩍 떠나버릴지 모르겠습니다. 화마가 집 한 채를 통째로 집어삼키듯 스트레스에 온통 잡아먹히는 날에는 제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리기 일쑤니까요. 그러니 불행 한가운데 숨은 기쁨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울 테지요. 아무리 나이만큼 경험이 쌓이고 많은 책을 읽는다 한들, '당신처럼 꿋꿋할 수 있을지, 과연?' 의문입니다.
그저 이 모든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을 처음부터 없던 것인 양 모른 체하고 견딜 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견디는 태도에 대한 글을 한 편 남겼던 거지요. 잘 버티고 있는 저의 대견함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의지와는 달리 잘 버티지 못하고 있으니 자신에게 내거는 다짐과도 같았달까요. 아니, 어쩌면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어르고 달래는 글이었을지도요.
https://brunch.co.kr/@byobyolina/198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여러 차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나요? 책 읽고 공부하며 교육자로서 열의를 불태운 일 외에 당신이 바란 것은 교수로서의 명예도 아니요, 대단한 부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돈과 명예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학문을 향한 열정과 교육자로서 지닌 신념을 침범하지 못했으니까요. 스토너, 당신은 완고하지만 단단한 사람입니다. 자기 연민과도 거리가 멀어요. 로맥스 교수가 훼방 놓으려는 부지런한 시도들이 유치하고 우스워질 만큼이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야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이유를 조금은 알았습니다. 어쩌면 매사에 과한 의미부여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필요한 건 단지,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그냥 행동에 옮기는 일일 뿐인 거죠. 그저 묵묵히요.
제가 당신이라면 행복에 거창한 의미는 필요 없겠습니다. 이렇게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두 손가락을 놀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한 끼 식사를 맛있게 먹고, 시답잖은 농담에 까르르 웃고, 책을 읽을 수 있고, 두 다리로 걸어서 산책할 수 있는 것 또한 기쁨이겠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오늘은, 가을바람이 좋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꽃 향기가 지금 이 순간을 풍요롭다고 여기게 해요. 가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스토너, 끝으로 당신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굳세게 버티지 못하거나, 어쩌다 잘 견딘다 하더라도 무수한 생각들로 괴로워지는 찰나에 당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야겠다고요.
그곳에서 당신의 고요한 안식을 기원하며,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