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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2)

헌정곡 Part.2 - 선물의 형태는 다양하다

by corda music studio


앞선 이야기: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밖에 없다 #1

스승의 아내를 사랑한 14살 연하 순정남, 브람스


아무래도 '음악을 헌정'한다는 단어의 조합이 우리에게 주는 로맨틱한 뉘앙스를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선물을 꼭 연정의 상대에게만 주지 않듯이, 헌정곡마다 담긴 사연과 의미 또한 아주 다양하다.


'인상주의' 작풍 작곡가 하면 가장 먼저 꼽히곤 하는 오케스트라 천재, 라벨(Maurice Ravel)의 경우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개성을 드러내어 처음으로 크게 인정받게 된 대히트곡, 물의 유희(Jeux d'eau)를 그의 스승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에게 헌정한 바 있다.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에 삽입된 볼레로(Bolero)의 작곡가, 그 사람 맞다


또,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다한들 이 이름은 들어봤겠지! 를 대표하는 작곡가중 하나인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본인의 이름 철자를 음이름*으로 딴 'B-A-C-H 음형'을 선율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장난은 이후 셀 수도 없이 많은 후대 작곡가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음이름: 우리가 익히 아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조가 바뀔 때마다 따라서 변하는 '계이름'이다.

각 음마다 해당되어 있는 절대적인 이름을 '음이름'이라고 한다.

KakaoTalk_20240908_080011709.png B-A-C-H 음형
건반.png 피아노 건반에 붙은 음이름

이렇듯 존경, 감사, 사랑, 지지, 기념 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모든 음악을 일컬어 헌정곡이라고 한다.




2.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곡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아! 당신도!

드뷔시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Children's corner


라벨과 함께 인상주의 작풍의 대표 작곡가로 꼽히는 드뷔시(Claude Debussy)는 그의 몽환적인 음악 스타일과 같이 공상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 슈슈(chouchou, 애칭, 본명은 클로드 엠마)를 위한 6개의 모음곡을 쓴 바가 있다.


드뷔시 - 어린이 정경(Childrens' corner) 中 첫 번째 곡,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Doctor Gradus Ad Parnassum)


자신의 소중한 딸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런 '음악동화'를 만들어주다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슈슈에 대한 드뷔시의 유별난 사랑은 유명했다. (물론 어린이를 위한 곡이라고 어린이가 연주할 난이도의 곡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제아무리 유치한 어린이 동화라 할지라도 그것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별난 그의 넘치는 사랑은 비단 딸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바다같이 넓은... 마음?

La mer, 바다


드뷔시는 바다를 좋아했다. 늘 바다에 대한 곡을 쓰고자 했지만 이 거대한 소재를 음악화한다는 것에 큰 부담과 고민을 안고 있던 드뷔시는 어느 날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보고 확신의 영감을 얻어 곡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셀 수조차 없는 그의 수많은 명작 중 하나인 바다(La mer)이다.


Katsushika_Hokusai_-_Thirty-Six_Views_of_Mount_Fuji-_The_Great_Wave_Off_the_Coast_of_Kanagawa_-_Google_Art_Project.jpg 葛飾 北斎 - 神奈川沖浪裏, (가쓰시카 호쿠사이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드뷔시는 자신의 부인 로잘리 탁시에르의 친정에 머무르면서 이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2년에 걸쳐 신중하게 곡을 써나가기 시작했으며, 그의 사랑하는 부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다. 그가 곡을 완성하자 그는 악보 초판의 표지에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싣고는, 이 곡을 출판업자 자크 뒤랑에게 헌정했다.

... 음?


어... 그게, 사연이 조금 복잡하다.

애초에 드뷔시는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넘치는 사랑력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예를 들자면...


18세의 나이에 자신의 후원자의 부인(32세)에게 수년간 구애한다거나(그녀를 위해 21곡의 가곡을 썼다고...)

그런 그녀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기 위해 유학 경비를 털었던 바로 그 유학길의 숙소에서 다른 누군가와 키스하고 있는 것을 발각당한다거나(딱히 연인 사이로 발전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유학에 돌아와서 결혼하지 않은 채로 새로운 연인 가브리엘과 동거를 한다거나(종종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브리엘과의 동거 사실을 숨긴 채로 유명 작곡가(포레, 이 글의 첫머리에도 등장한다)의 제자에게 청혼한다거나

가브리엘의 친구 탁시에르에게 자살협박으로 결혼을 요구한다거나(불행히도 이 방법이 먹혔다)


... 아무튼 사랑에 후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아, 심란해. 너무 우울해서 원고를 그만 쓰고 싶다.

이러한 커리어를 십분 살려 탁시에르와의 반강제적인 결혼생활 중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의 어머니, 즉 학부형이었던 엠마 바르닥과 밀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바르닥은 당시 드뷔시가 로잘리와 결혼한 줄 몰랐으니, '밀회'는 아닌가? 그의 끔찍이도 사랑하던 딸 슈슈도 이때 태어났다. 이후 그가 사망하기까지 약 10년간은 별 탈 없이 살았다니 그의 딸에게는 좋은 아빠로 남았을지 몰라도, 탁시에르가 삶에서 빼앗긴 것들을 생각하면... 그녀가 먼저 떠난 친구 가브리엘의 곁으로 가고자 했던 것을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나마 받기로 예정되었던 헌정곡, 바다조차 도로 빼앗겼으니.


아, 별개로 그의 음악 자체는 너무나도 훌륭하다.

아무래도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수정에 수정을 거쳐 인생의 역작을 만들어야만 했으리라.


아래의 음악은 바다의 세 개의 악장 중 첫 번째 악장,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에 걸맞게 리듬이나 선율보다는 순간순간 등장하는 악기의 소리가 섞여 들어가며 전체적으로 음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 화음이 변할 때마다 분위기는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포커스를 맞춰 감상하는 것이 추천된다.


Debussy - La mer 中 1st mov.


바다, La mer 는 총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악장의 부제는 아래와 같다.

1악장: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2악장: 파도의 희롱

3악장: 바람과 바다의 대화 (간단히 말하자면, 폭풍이다)


3악장, 바람과 바다의 대화라.

간단히 말하자면, 폭풍이다.

드뷔시가 이 곡의 3악장을 쓸 때쯤 그는... 부인 몰래 엠마 바르닥에게 청혼하고 있었다.

Debussy - La mer

전곡 들어보기




3. 아이고,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럼 곡 하나 야무지게 올려보겠습니다!

베토벤


-> 고전과 낭만 사이의 인터루드

베토벤은 그만의 '마니아층'을 형성해 후원을 받는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했기에 후원자의 존재는 단지 그의 관객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계와 직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귀족이고 뭐고, 자유주의자 베토벤의 성격상 단언코 헌정 대상의 취향은 그의 음악에 있어서 고려사항이었을 리가 만무하며(아마 진정 그의 음악스타일을 사랑하던 후원자였다면 오히려 그런 것을 원치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준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담백한 감사의 표시에 가까웠다.


- 피아노 소나타 8번

Beethoven - Piano sonata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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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 Piano sonata No.8


비창이라는 부제(베토벤이 붙인 것은 아니다)가 붙은 이 피아노 소나타는 아마 베토벤의 피아노곡들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3악장은 베토벤 바이러스(제발 영문모를 바이러스 타령은 그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후원자이기도 하던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 공작(Prince Karl von Lichnowsky)에게 헌정되었으며, 당시 베토벤에게 있어 큰 힘(경제적)이 되어주었던 후원자였다. 베토벤의 여러 곡들이 그와 그의 동생에게 헌정되었지만, 8번 소나타가 작곡될 무렵이 베토벤의 청력 이슈가 시작된 시점과 일치한다. 안 그래도 더러운 베토벤의 성질머리가 더더욱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된 계기가 되어 후에 심하게 싸우고 절교했다고 한다.


- 피아노 협주곡 5번

Beethoven - Piano concerto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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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아노 협주곡은 성직자이자 귀족이었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다. 물론 베토벤의 후원자였으며,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후원자들과의 연락이 끊기거나 관계가 악화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던 베토벤에게 매 해 엄청난 액수를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계의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위대하고 숭고한 작품을 창조하며, 오직 그 분야에 헌신할 수 있다.


그저 빛...

베토벤조차 그에게만은 친절했으며(그 누가 저런 계약서를 읽고도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의 곡 중 열네 곡을 그에게 헌정했다. 다만, 귀족 출신이었던 루돌프 공은 곧 프랑스혁명에서 제거대상으로 지목된다.



- 영웅 교향곡

Symphony No.3, 'Eroica'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영-웅 교향곡'은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나폴레옹에게 헌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웬걸, 자유와 평등을 앞세우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오르자마자 베토벤은 그에 대한 헌사를 찢어버렸다. 베토벤은 나폴레옹도 찢어


Beethoven - Symphony No.3, 2nd mov.



editor_D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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