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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Jan 06. 2021

생일선물로 프라이팬을 받았다

오늘의 청소 - 정신승리 

 올해는 뭐 받고 싶어? 다정한 호군의 질문. 글쎄... 갖고 싶었던 스웨터를 캡처해놓고 망설이고 있던 터라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타이밍이 언제가 적절한가 싶었다. 지금까지 생각을 안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준비할 시간이 없잖아- 재촉하는 말에 난 알았다고, 오늘 저녁엔 말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호군을 뒤로하고 난 휴대폰을 열어 스웨터를 다시 본다. 도톰하고 따뜻해 보이는 갈색 스웨터. 다시 봐도 예쁘다. 아, 역시 이걸로 사달라고 할까.




 잘 벌어 잘 쓰면 좋으련만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생활이 이어지고, 짐을 줄이기 시작하며 단순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니 덜컥 뭔가를 사는 게 망설여졌다. 물론 꼭 필요한 소비는 거침없다. 여행도 가고 싶고, 좋은 곳에서 외식도 하고 싶고, 비싼 캠핑장비도 기웃거려본다. 하지만 옷이나 장신구는 왠지 사는 게 꺼려지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지 몇 번이고 되묻게 된다. 지금 나에게 그 옷이 꼭 필요한지, 옷이 가진 상징이 필요한지 여러 번 고민하게 되는 것. 그래서 스웨터가 갖고 싶다는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옷이 필요한 걸까, 그 브랜드 옷이 주는 심리적 만족감이 필요한 걸까.


 사이트를 열어 스웨터를 다시 봤다. 울 혼방으로 만든 스웨터를 구매한 사람들의 리뷰를 읽어봤다. 너무 만족스럽고 너무 예쁘다고 칭찬 일색. 마음이 혹한다. 역시 스웨터인가. 그래, 생일선물인데 뭐. 일 년에 한 번인데-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로 사면 안돼? 이번 생일 선물은 내 심리적 만족감으로 하는 걸로 하자.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편하다. 그럼 점심을 먹어볼까- 


 집에 부추가 있으니 부추를 썰고 매운 고추를 썰어서 부추전을 해야겠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고 부침가루를 찾아 반죽을 해줬다. 그리고 프라이팬을 꺼내야 하는데... 우리 집엔 프라이팬이 없다. 코팅이 벗겨져 진즉 내다버리고 웍으로 생활한 지 3개월이 넘어간다. 웍만 있어도 지낼만해서 굳이 프라이팬을 사지 않았는데, 부추전을 할 생각을 하니 웍의 바닥면이 좁아 보인다. 미니 사이즈로 여러 장 부치면 되지 뭐- 하고 신나게 요리. 웍에다 부쳐도 프라이팬에 부쳐도 부추전은 똑같이 맛있구나- 하고 식사를 하지만 프라이팬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왜... 죠...?


 저렴한 코팅 팬을 사서 1-2년마다 교체해주면 될 문제인데, 계속해서 그런 소비를 하는 것도 싫고 그게 싫으면 무쇠 팬이나 스테인리스 팬을 사면 될 터인데- 똥 손인 내가 그것들을 잘 관리할 자신도 없다. 시즈닝을 할 자신도 없고 기름이 팬 위에서 또르르 굴러갈 시간까지 충분히 예열했다가 계란을 터트릴 자신도 없다. 익숙해지면 금방이라는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프라이팬은 당분간 보류. 내가 살림에 좀 더 익숙해질 때까지 사는 걸 미루자 했건만- 웍으로 버텨보자 했건만- 이미 그 녀석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버렸다.


 검색만 하는 건데 뭐-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검색만 해보자. 그리고 폭풍 검색.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모델부터 유명한 셰프가 사용한다는 모델까지. 종류를 나열하고 가격을 비교하고 각 프라이팬의 미모를 분석했다. 우리 집에 들어올 아이라면 프라이팬 본연의 기능은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훌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는 아이가 있는지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니, 몇 가지로 추려진다. 하지만 비싸다. 와우. 


 스웨터 가격이나 프라이팬 가격이나 비슷하다. 양심 상 둘 다 사는 건 어렵다. 뭔가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때 가능한 눈으로 보고 만져본 뒤 사는 게 가장 좋으니까. 스웨터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샵에서만 확인할 수 있고, 프라이팬은 근처 아웃렛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프라이팬을 보고, 만져보니 별로면 스웨터로 간다. 


 그리고 주말, 호군과 함께 아웃렛에 들러 프라이팬을 만져봤다.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무겁긴 하지만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부추전을 휙 돌릴 순 없겠지만 두 손으로 돌리면 가능할 것도 같다. (이미 여기서 난 넘어갔다) 화면으로만 봤으면 계속해서 고민했을 터인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꼭 이게 필요해졌다. 이 프라이팬이 아니면 안 된다.  진짜 생일선물로 프라이팬? 괜찮겠어? 호군이 묻는다. 이미 홀딱 넘어간 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이 지금 딱 내가 갖고 싶은 선물이라고 손잡이에 이름 박아달라고 내 거라고 눈을 반짝인다.




  그렇게 우리 집엔 새 프라이팬이 생겼다. 두 손으로 힘겹게 전을 부치고 얇은 햄을 올려두면 한순간에 타버리지만 두꺼운 스테이크를 굽거나 기름을 적게 사용하고 싶은 요리엔 매우 유용하다. 겨울 한철 입는 스웨터는 날아갔지만 사계절 사용하는 고오급 프라이팬이 남았다. 호군이 프라이팬을 꺼낼 때마다 말한다. 어어- 내 껀데? 조심해서 사용해줬으면 좋겠네? 끌끌 혀를 차며 호군은 말한다. 그래 봤자 프라이팬이거든? 그냥 프라이팬 아니라고!!! 고오급 프라이팬이라고!!!


 생일 선물로 프라이팬을 받았다.

 아니, 아니지.

 생일 선물로 "고오급 프라이팬"을 받았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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