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다래 Apr 22. 2021

도서관 투어, 괜찮나요?

오늘의 청소 - 책 구매

 책이 무슨 원수라도 되는 마냥 책장에 있는 책을 반복적으로 비워내고 수중에 백여 권의 책만 남았다. 이 책들도 언젠가 비워내야 하겠지만 책을 골라내고 상자에 담아 보내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다는 변명으로 차일피일 미뤄본다. 올 상반기가 끝나기 전에 반을 비워야지- 우선 달력에 적어두는 것으로 숙제를 미룬다.


 책을 비우는 일이야 이렇게 숙제로 남겨놓는다 하지만 책을 사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드라마의 기승전결과 다른 책에서만 느끼는 이야기의 흐름에 재미를 느낀다. 한 회에 한두 번 자극적인 사건을 끼워 넣는 드라마를 보면 초반 주인공들의 감정이 쌓여가는 회차까지는 입꼬리가 치솟도록 웃어대는데 역경을 맞이하는 이후 회차는 내가 너무 조마조마해 볼 자신이 없다. 그런데 책은 평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도 많고 자극적인 부분들 역시 내가 읽는 흐름에 맞춰 등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두 순간만 지나면 그럭저럭 읽을만해진다. 또 너무 심하다 하는 부분은 눈으로 스윽 훑어내려 적당히 패스도 가능. 이야기로서의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집에 물건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하며 책 역시 구매가 멈춘 품목 중 하나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동네 도서관이 하나, 20분 거리에 옆동네 도서관이 하나 있는 훌륭한 동네에 살고 있어 책을 사지 않아도 궁금한 책들은 얼마든지 빌려볼 수 있다. 숙제하듯 당장 읽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도서관 서가를 천천히 구경하며 관심 있는 주제의 책이나 작가의 책을 골라 읽고 느긋하게 반납하는 일상을 즐겼다.


 그런데 이런 게으른 도서관 러버에게 두 가지 사건이 생겼다. 하나는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책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줌으로 모여 정해진 분량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책 읽기 프로그램에서는 한 책을 약 한 달이라는 시간에 걸쳐 읽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주는 기간은 2주, 연장은 일주씩 2회에 거쳐 가능하다. 처음엔 막연히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겠지 싶었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들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책을 선정해서인지 도서관에 책이 있는 날이 없다. 도서 예약 버튼을 눌러보지만 대기 번호 5번이나 6번. 이 순서라면 난 두세 달 후에나 책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 사건은 조카와 책 읽기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중학교에 올라간 조카와 초등학교 5학년 조카에게 서로 다른 책을 읽게 하고 일-이주일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엔 막연히 책 읽는 일이야 뭐- 어렵지 않지-라고 생각해 조카에게 줄 책을 한 권 구매해 내가 미리 읽고 조카에게 건네는 방식이었는데 이렇게 하다 보니 읽는 시간 차가 생기며  기억이 흐릿해져 대화의 밀도가 낮아져 버리는 단점이 생겼다.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내 책이 필요하다-라고 생각되어 온라인 서점 구매 버튼 앞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는 나를 보았다. 쉽게 버튼을 누를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 내가 두고두고 사랑할 책인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과 그렇게 책을 사버리면 책장에 다시 쌓인 책을 되파는 일을(분명 내가 숙제로 미뤄두었던 그 일!) 더 해야 한다는 것. 확실한 애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귀찮음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이 도시의 도서관을 모두 가보기로 했다.


 내가 주로 방문하는 두 도서관에 책이 없다면 우리 집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 중 책이 있는 곳을 검색한다. 다행히 한두 군데엔 책이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차를 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른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자. 굳이 이렇게까지?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마음으론 집 앞으로 다음날 배송해 주는 11800원짜리 책 한 권 사는 일보다 조금 먼 동네의 도서관에 가는 일이 내겐 더 합리적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의 도서관 투어가 시작되었다.


 도서관 어플에서 책을 검색하고 책이 있는 도서관의 위치를 찾아본 뒤 도서관의 휴관일과 운영시간을 체크한다. 차로 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좀 더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게 좋으니까 미리 검색 검색. 서가의 위치와 주차정보를 확인하고 차를 타고 낯선 동네의 도서관에 간다. 몇 개의 언덕을 지나고 차선은 왜 이렇게 합류하는지 알 수 없는 어려운 길을 지나 겨우겨우 도착한 도서관의 후문은 닫혀있다. 코로나로 인해 정문만 개방한다고 한다. 그럼 다시 정문이 어디인가- 도서관을 돌고 돌아 지하 1층에 있는 정문을 찾아 체크인을 하고 온도를 재고 문헌정보실을 찾아 다시 두리번두리번. 분명 검색했음에도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은 3층, 엘리베이터로 한 번에 갈 수 없어 2층에서 내려 한 층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겨우 서가로 올라와 찍어놓은 책을 한 권 빼어 들고 돌아가야지 하다 도서관을 둘러봤다. 우리 동네 도서관과는 규모부터 다르게 으리으리하다. 동네 도서관엔 책도 한 권씩 뿐인데 여긴 세 권씩 꽂혀있는 책도 보인다. 낯설지만 익숙한 도서관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껴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도서관의 공기를 느낀다. 어차피 반납하러 다시 와야 하는데- 다른 책도 한 권 더 빌려갈까? 하는 생각에 제목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렇게 서가를 옮겨 다니며 구경하다 다른 한 권을 골라내 두 권을 셀프 대여한다.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몸은 피곤하고 소파에 늘어지게 눕고 싶은 마음뿐. 과연 내가 이 도시의 도서관을 다 다니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한 시간을 돌아다녀 손에 쥔 책 두 권. 책을 샀다면 내가 원하는 만큼 읽고 더 이상 필요 없는 타이밍에 내놓아도 되었을 텐데. 일을 사서 하였구나... 현타가 밀려온다. 나는 대체 왜 그 먼 도서관까지 책을 빌리러 간 걸까.


 골똘히 생각한 결론은 하나다. 아직 내가 책을 구매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책 이십 권만 치마폭에 꼭 싸매고 있을 거야-가 머릿속 강박처럼 자리 잡아, 내가 가진 책을 생각하면 책을 산다는 죄책감이 나를 저 먼 도서관까지 인도하였다. 바보처럼 저 멀리 있는 도서관에 직접 다녀와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다. 잘 비워내고 현명하게 구매해야 하건만, 비워내는 일은 미루고 구매도 미루며 육신의 피곤함만 얻었다.


 6월로 미루었던 책 정리를 오늘 다시 시작해야겠다. 책장을 비우고 마음 편히 내게 꼭 필요한 새 책을 사련다. 지금 내게 더 필요한 건 구매하지 않겠다는 강박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다. 비움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자유라면 기꺼이 비워내야지.

 

 


작가의 이전글 봄엔 반찬가게로 가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