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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04. 2023

순례길 열일곱 번째 이야기

메세타가 주는 선물

구간 : 카스트로헤리스 - 프로미스타
거리 : 25.3KM
시간 : 8시간


  오늘은 동키 서비스를 이용했다. 어제 신나게 걸은 탓인지 발목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25.3KM를 걷는데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마을을 나서자마자 조그마한 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짐을 보내고 걷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가니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례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바람이 어제보다도 더 쌀쌀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가볍게 걷고 싶어서 아노락 재킷을 두고 온 것이 계속 후회됐다. 특히 산을 오르며 맞은 차디찬 바람은 어제의 밥심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렇게 그늘진 오르막을 겨우 오르자 드디어 햇빛이 내 몸을 감싸왔다.



  갈길이 멀기에 발길을 재촉했다. 테이블 모양의 분지를 지나 내리막을 걸었고, 이후에는 계속해서 평지가 나타났다. 그렇게 나보다 먼저 출발한 순례자들을 지나치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다른 이들의 걷는 속도는 나를 앞질러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나보다 키가 큰 외국인 친구들이 훨씬 빠른 속도로 나를 앞질러갔지만 오늘 걷는 길에서는 나보다 빠른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보다 앞서간 순례자들을 앞지르기는 해도 누군가가 나를 따라잡지는 못한 채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멈춘 바에서는 어느 스페인 모녀를 만났다. 며칠 전 나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고 나서는 그다음부터 종종 안부를 묻는 관계였다. 딸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한국을 좋아하고 서울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혼자 유튜브를 보고 배웠다고 대답했다. 한국말이 아직 서툴긴 해도 계속해서 배우기 위해 나에게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더 활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며 순례길의 끝에서 만날 때는 훨씬 자유롭게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모녀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계속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메세타 구간에서 걷다 보면 여지없이 등장하는 해바라기와 추수가 끝난 밀밭. 점점 지평선이 보이며 그 규모가 커지긴 했지만 해바라기 밭은 처음의 웅장함보다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황금빛의 밀밭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길의 배경일뿐 특별함이 없었다. 여전히 내 앞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걷고 있었고, 그들을 앞질러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걷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내 앞에는 순례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따라잡을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이 들었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어느 때보다 가볍게 걷고 있는데, 나는 왜 여전히 서둘러서 가고 있을까? 나는 무슨 목적으로 내 앞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으며, 과연 그들을 온전히 다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 훨씬 가벼워진 어깨와 순례길에 적응해 편해진 발을 가지고도 왜 나는 어제와 같이 앞만 보고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멈추어 섰다. 마침 목적지 마을에서 한 두 마을 전이었다. 아직 가야 할 거리는 적지 않게 남았다.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속도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10분에 1KM를 걷고 있던 발걸음을 늦춰 같은 거리를 20분에 걸어보려 노력했다. 내가 앞질러온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앞질러갔다. 그중에는 나더러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몸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물어왔다. 나는 같은 사람에게 세 번을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지금 좋아.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나뭇잎과 들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소리 사이 중심을 맞추어 그들을 공평하게 듣다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같은 소리를 들어보았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를 둘러싼 소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하모니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 곧 떨어질 것처럼 나뭇잎이 흔들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에 몸을 맡겨 부드럽게 흔들리기도 했다. 여전히 급한 사람들의 발소리는 소란스레 지나가고 있었고 이제는 그 소리도 점차 줄어들었다.



  큰 나무들을 지나 밀밭이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비현실적인 색감의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모두 추수되어 볼품없어진 밀밭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작은 해바라기가 하나 피어있었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에서 벗어나 추수가 끝나고 생명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밀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해바라기와 고요히 마주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시 도로로 나와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렇게 이 지역을 통과하는 수로를 마주쳤고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1KM마다 걸린 시간을 알려주던 내 시계는 계속해서 20분이 넘는 소요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에게도 퍽 이상할 것이었다. 정신없이 모든 발걸음을 세어 시간과 거리를 얼른 계산해 왔었을 텐데, 갑자기 쨍한 햇볕 아래에서 여유를 부린다니. 아마 내 시계도 이렇게 천천히 걷는 나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큼은 시계가 실수하더라도 이해하기로 했다.


누군가 내게 갑자기 천천히 걷는 이유를 물어올 때마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날씨가 좋습니다. 바람이 천천히 불어옵니다.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까미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왔으면서도 나의 모든 하루 끝의 목적은 내가 도착하는 목적지에 있었다. 나는 그곳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얼마큼의 시간을 소요해서 갈 것인가. 순례길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대답은 길 위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면서도 목적지만을 향해 누구보다 빠르게 걸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찾아야 하는 나의 의미는 길 위에 있었으나 어느새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수많은 의미들을 보여주던 나의 길을 지나쳤다.


나의 의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아니라 

그곳에 닿기 위해 견디는 고통과 해냈다는 자부심과 

끊임없는 시간 속의 고민과 느리게 맞이하는 풍경에 있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빨리 걸으려 하겠지만, 오늘 멋진 생각을 한 번 했으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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