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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21. 2023

순례길 열네 번째 이야기

부르고스 대성당(1)

구간 : 산 후안 데 오르테가 - 부르고스
거리 : 26.5KM
소요 시간 : 6시간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는 마을들은 중심부마다 성당을 가지고 있다. 몇몇 마을에서는 이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묵을 수도 있다. 마을에 병원이나 학교 등 편의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이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의 여러 기구들이 자리 잡고, 그리고 마을이 확장된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다음 도착하는 마을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 끝에 보이는 높은 성당 십자가를 찾는 것이 편리하다. 십자가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있다. 지도가 없을 때는 십자가를 보면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순례길의 의미가 더욱 짙어지지 않았나 싶다.



  성당의 크기와 마을의 크기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도시에서 만나는 성당은 대부분 규모가 남다르다. 특히 스페인 3대 성당이라고 불리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처음 마주한 순간에 느꼈던 웅장함은 이전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원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대성당이며 세비야, 톨레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두 번에 걸쳐 지어졌는데, 처음 지어졌을 때는 르네상스 스타일로, 그리고 두 번째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의 성당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건축 양식을 감상할 수 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까지 걷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어야 했고, 그늘이 없는 길을 끊임없이 걸었다. 특히 더 힘들었던 것은 까미노 닌자 앱에서 알려주는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숙소가 부르고스 대성당 바로 앞에 있다 보니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로 진입하는 지점부터 한참을 더 걸어가야 했다. 분명 큰 도시가 나와서 차와 사람이 많아지고 음식점과 카페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에 곧 숙소에 도착해 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지만, 아무리 걸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에 생기는 절망은 도시 안에서 걷는 순례자의 발걸음을 몇 배는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부르고스 시내로 진입하여 한참을 더 걸어 겨우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가 부르고스에서 머물렀던 알베르게는 대성당 뒤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는 성당의 뒷모습부터 바라보았다. 마치 영화에서 극적인 순간에 주인공이 등장하듯 서서히 등장하는 부르고스 대성당의 정면 모습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첫 번째로 성당의 규모에 감탄했고, 두 번째는 성당 외벽에 오밀조밀하게 장식된 조각상에 감탄했다. 그것이 가진 엄청난 모습은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대성당은 그렇게 순례자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잠시 멈춰 세운 후 그 모습을 천천히 뜯어보게 만들었다. 건축과 미술에 관해 문외한인 사람도 이 건물을 마주한다면 건축가와 조각가의 대단한 정성과 미적 감각에 넋이 나갈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이러한 힘이 1984년 부르고스 대성당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건물이 가진 더 큰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낮에 해가 높이 떠 있을 때는 회색 빛의 차가운 색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순간에는 노란빛의 따뜻한 색으로,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는 석양 색과 공명하듯 분홍 빛으로 물들었다. 공기의 색에 따라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성당의 색도 변했다. 나는 대성당 입구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아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계단에 앉아 에펠탑을 바라보던 날보다도 로맨틱하고 웅장했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가지게 되는 도시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역시 도시를 대표하는 건물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을 것 같이 큰 건축물이라던지, 다른 건축물과는 차별화된 특별한 미적 감각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은 해당 지역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파리에 가서 하루 종일 에펠탑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또 다른 사람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여행의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그곳을 대표하는 상징물의 힘이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이 닿을 수 없을 만큼의 위엄과 깊이. 부르고스에서 해질 무렵 한 시간 동안 대성당의 색이 변하는 모습을 관찰한 내 경험은 다른 사람의 귀한 경험과 견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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