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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02. 2023

순례길 열여섯 번째 이야기

오리온 알베르게, 한국의 맛

구간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 카스트로헤리스
거리 : 19.6KM
소요 시간 : 5시간 30분


  메세타 구간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해가 뜨고 나면 괜찮았지만 아침 일찍 출발할 때는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몸이 떨릴 정도였다. 이 구간이 고원이기 때문에 바람이 많이 불었고, 이전보다 차가운 바람이 나를 덮쳐왔다. 아마도 내가 처음 출발했던 시기가 유럽의 이상기온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조금 잠잠해진 지금에는 출발 시간 조정이 필요했다. 원래는 새벽 4~5시에 출발했었지만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출발 시간을 6시 이후로 늦췄다.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가져온 고어텍스 아노락이 큰 도움이 되었다. 메세타 구간이 시작되고 며칠 동안은 걸어야 할 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금 늦게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점심시간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남은 거리 / (우) 겨우 만난 첫 번째 바


  오늘의 목적지는 카스트로헤리스의 '오리온 알베르게'였다. 먼저 앞서간 부자 일행이 단체 채팅방에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먹은 음식들의 사진을 올렸다. 한식에 굶주려있던 한국인 무리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오리온 알베르게에서는 스페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한국 음식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올린 라면 사진은 얼큰함에 목말라있던 한국인의 본능을 깨웠다. 다른 곳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예약을 진행시켰다. 오늘 걸었던 길의 모든 더위와 피로는 '한식'이라는 확고한 목표 하나에 잠재워졌다.



  알베르게의 체크인 시간은 12시부터였다. 19.6KM라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기에 평소보다 여유를 가지고 걸었다.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고, 바가 나오면 앉아서 음료를 마시기도 하다가, 길가에 서있는 건축물들을 감상하며 오늘 길의 모든 걸음을 꾹꾹 눌러 밟았다. 그럼에도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크지 않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알베르게 앞을 잠시 구경했다가 근처에 있는 바에 들려서 시원한 콜라를 마셨다(순례길에서의 콜라는 자동차의 기름과도 같다). 얼마 간을 기다려 알베르게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문이 열려있었다. 여자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숙소비 12유로와 저녁식사 12유로, 총 24유로를 지불하고 방을 배정해 주셨다. 그리고 로비에 내려와서 메뉴판을 마주했다.



  점심 식사부터 환상이었다. 힘든 몸을 이끌고 마무리한 오늘 순례길의 끝에는 라면과 김밥을 안주로 하는 소맥이 있었다. 길을 걸을 때는 콜라가, 길을 걷고 난 후에는 맥주가 필수였는데 오늘은 소맥이었다. 유럽의 기름기에 느글거리던 속은 라면 국물 한 숟가락에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라앉았다. 김밥은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이 나와 힘을 끌어올려주었고, 목이 텁텁할 때쯤 마시는 소맥 한잔은 김밥의 힘을 아랫배에서부터 머리끝으로 이끌었다. 소맥의 알싸한 느낌은 다시 라면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라면과 김밥, 소맥을 뚝딱 해치웠다. 잠시 마을 구경을 한 뒤 낮잠을 자고 다시 마을로 나가 내일을 위한 장을 보고 들어오니 저녁 식사 시간이 됐다. 



  걷고, 먹고, 자고, 다시 걷고, 먹고, 자는 하루의 끝에는 비빔밥과 된장국이 있었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으슬으슬해진 몸을 순식간에 회복시켜 주었다. '비빔밥' 하면 '전주', 전주 사람인 나는 내 돈 주고 한 번도 사 먹어본 적 없는 고향의 비빔밥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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