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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Sep 05. 2018

당당하게, 익스큐즈 미


엄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와 엄마는 3일 만에 이 여행에 완벽히 적응한 것 같아. 나 오늘 솔직히 좀 충격받았잖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또 기억 안 난다고 하려거든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지금부터 여기에 소상히 써줄 테니까. 


우린 브뤼셀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넘어가는 탈리스 기차 안이었어. 여행을 시작할 때 도시에서 도시로 넘어가는 이동이 많아서 그 긴긴 시간 엄마와 단 둘이 어떻게 보낼까 조금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지 뭐. 어려서부터 엄마는 내게 제일 친한 친구였으니까. 베프랑 몇 시간 수다 떠는 거야 일도 아니잖아. 



한참을 그렇게 창 밖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승무원들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눠줬어. '뭘까? 표 검사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더라. 승무원들 손에 검표기가 아니라 작고 예쁜 빨간 박스가 들려있었거든. 대충 눈치를 보니 오늘이 이 기차 회사의 무슨 기념일인 것 같았어. 손에 든 케이크는 오늘을 축하하는 것이었고. 


나는 '오호 완전 럭키네. 안 그래도 말 너무 많이 해서 당 떨어졌는데 지금 케이크 한 조각 먹으면 딱이겠다!' 생각하며 내심 기대하고 있었어. 그런데 승무원이 우리 자리에 옆에 왔을 때 다른 승객이랑 마구 대화를 하더니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만 안 주고 그냥 넘어가는 거야. 아니 왜! 솔직히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우리에게 영어로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가 싶었어. 에이 아니겠지? 그냥 정신이 없어서 한 좌석 건너뛴 거겠지? 괜히 기분 나쁘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어. 



그래,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이 일은 일어났고. 우리에겐 케이크가 없었어. 다른 사람들은 뜻밖에 찾아온 선물에 기뻐하며 달콤함을 한 스푼, 즐기고 있는데 우리 손에만 아무것도 없었지. 나는 생각했어. 


'불러 세워서 물어보자니 부끄럽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부끄럽고, 그 상황에서 영어를 뱉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냥 조용히 있자. 케이크 하나 안 먹는다고 세상 두 동강 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내 인생에 케이크는 없었던 거야. 어차피 저거 받아봤자 지금 다 못 먹으면 짐이잖아.' 


저런 작은 케이크 조각 따위 나 같은 푸드 파이터가 다 못 먹을 리 없다는 거 알면서도 그렇게 스스로를 자제시키려고 노력하는데... 엄마가 안 도와주는 거야!



"왜 우리만 안 주고 가니?"


"그... 글쎄..."


"그러면 안 되지. 엄마도 케이크 먹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다 받았잖아."


"그... 그렇지. 그런데 뭐 벌써 지나가버렸는데 부르기도 뭐하고. 그냥 내려서 더 맛있는 거 사 먹자."


"사 먹긴 왜 사 먹어. 저건 공짜인데! 가만히 있어 봐!"


"뭘 가만히 있..."


익. 스. 큐. 즈. 미!


난데없는 엄마의 익스큐즈 미 샤우팅 한 번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어. 오 마이 갓. 덩치가 산만 한 승무원 아저씨는 무슨 일이냐는 듯 우리를 돌아봤지. 그때 엄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왜 우리만 케이크 노?
케이크 없어. 케이크 플리즈.



엄마 입술에서 나온 단어는 몇 개 없었지만 (게다가 교묘하게 한국어를 섞었지) 엄마는 눈짓과 손짓으로 ‘남들은 다 줬는데 우리는 안 줬어.’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했어. 그러자 승무원이 깜짝 놀라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우리에게 케이크를 가져다줬어. 케이크를 받아 들고 “거 봐, 말하니까 주잖아!”라고 말하며 나를 돌아보던 엄마의 그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며 나는 눈을 깔 수밖에 없었지. 


와 진짜 우리 엄마 대단하다. 

홍합 먹는 거 부끄럽다고 한 사람 어디 갔어? 

벨기에에 버리고 온 거야?


엄마의 전리품(?)을 받은 나는 '아아 탈리스 올해가 20주년이구나...' 괜한 말을 작게 중얼거렸어. 겸연쩍어하는 날 보고 엄마는 말했지.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은 다 똑같다고. 말이 안 통해도 괜찮다고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엄마는 오늘도 이렇게 내게 어디서든 당당하라고, 누구든 믿고 긍정하라고 가르쳐준 거야.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세상에, 창 밖으로 풍차가 보이기 시작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나 봐. 엄마는 "어머 어머 별아 우리 네덜란드 다 와가나 보다!"하고 엄청 좋아하네. 나는 촌스럽게 뭐 그렇게 반응하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나도 가슴이 벌렁벌렁 하다. 그렇지만 난 엄마 딸이니까. 당당하게 한 번 말해볼게.


Hoi, Amsterdam! (안녕, 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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