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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Sep 06. 2018

엄마에겐 숙소도 집이다

엄마, 

나는 지금 살짝 헷갈려. 여기 우리 집 아니잖아. 그렇지? 



암스테르담의 호스트는 과연 세계에서 가장 큰 네덜란스 사람답게 키가 2미터는 될 것 같은 청년이었어. 어느 정도냐 하면 그가 쓰는 세면대 확대경이 달린 위치가 내 키를 훌쩍 넘겨 정수리를 비출 정도랄까. 아 그건 정말 서로에게 충격이었지. 


아무튼 로버트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밝은 금발에 커어-다란 덩치, 그리고 활기가 과하다 싶게 넘치는 정신없는 친구였어. 로버트가 겅중거리며 (실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다리가 너무 길어서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거야.) 집안 곳곳을 설명해주면, 우리는 종종거리며 (이건 진짜야.) 열심히 따라다녔지. 


친구들과 함께 암스테르담의 진짜 모습을 여행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로버트는 우리에게 암스테르담에서 꼭 가야 할 추천 장소와 자신의 오늘 저녁 스케줄까지 상세히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야 우리에게 열쇠를 넘기고 집을 나섰어. 뭐랄까, 참 밉지 않게 눈치 없고 수다스러운 친구였지. 



로버트가 나가자마자 엄마는 숙소를 아주 구석구석, 매의 눈으로 검사하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어. 


“이노무 시키 이거 봐라 이거, 여기 안 닦아서 새까맣다.”


“아이고, 이걸 여기다 이렇게 두면 어떻게 해. 가만히 있어 봐, 이리 옮겨둬야지.”


“등이 왜 이렇게 침침해. 형광등을 사다 달아야지 이게 뭐야...”


“아유 이건 뭐야! 이런 건 버리고 새로 사지 왜 계속 쓰고 있어!”


"냄비가 이거 하나야? 좀 더 깊은 게 있어야 누룽지를 끓이는데."



엄마, 누가 보면 아까 그 호스트가 엄마 아들인 줄 알겠어. 아니 무슨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 둔 방법까지 잔소리를 하냐고. 아까 잔소리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엄마가 영어 못해서, 로버트가 한국어 못해서 천만다행이다. 둘 중에 하나라도 했으면 큰 일날 뻔했어. 이노무 시키라니 남의 시키한테 왜 시키시키 거려. 


제발 그만 하고 일단 좀 쉬라고 말리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낡은 가죽 소파에 앉은 엄마는 내 눈치 보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연신 아쉬운 눈빛으로 집을 계속 살폈어. 아 이 열정 어떻게 할 거야. 안 말리면 정말 나가서 형광등이라도 사다 달 기세더라고.



여행지에서 숙소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잖아. 여기도 고작 4일 있다가 떠날 곳이고. 그런데 왜 엄마는 짧게 스쳐 지나갈 공간을 엄마 집처럼 만들어 두려고 할까, 왜 이리 마음을 쓰는 걸까. 나는 궁금했어. 


그러다가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이 한 권 떠올랐어.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라는 책인데, 저자인 공간 디자이너 최고요 씨는 30년 된 15평 다가구 주택에 월세로 살면서 자신의 집을 가꾸고 즐기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 큰 인기를 얻은 사람이야.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세나 월세를 살면 '내 집도 아닌데 뭐'라고 하면서 벽지가 취향에 맞지 않아도, 몰딩이 너무 싫어 볼 때마다 기분이 울적해져도 그냥 꾹 참고 살잖아. 저자는 그걸 행복을 미루는 일이라고 이야기해. 그리고 지금 내가 머무는 공간을 소중히 대하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지. 바로 이렇게 말이야.



"집을 가꾼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돌본다는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방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어느 구석, 어느 모퉁이 하나도 대충 두지 않고 정성을 들여 돌보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삶을 대하는 방식이자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난 깨달았어. 엄마는 이미 행복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말이야. 유명한 책을 쓰지도 않았고, TED에 나가 행복에 대한 강의를 하지도 않았지만 엄마는 어쩌면 세상의 그 어떤 작가나 연사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그리고 그게 그냥 삶에 그대로 녹아있지. 본인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말이야.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걸레질은 하지 말자. 제발.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잖아. 이러다 이불 빨래도 해주고 가겠네 이 아줌마!


엄마, 창 밖으로 운하가 보이고 보트 하우스의 사람들이 배 위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어. 

우리도 이제 나갈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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