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 Feb 11. 2020

나는 태권도를 못한다


나는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한다. 춤도 못 추고, 자전거도 못 타고, 몸을 끌고 이동하는 것도 젬병이다. (아주 심각한 길치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할 줄 아는 운동도 없다.


학창 시절 피구를 할 때 공이 허공을 가르무조건 "악!"하고 소리 지르며 눈을 감고 바닥에 주저앉는 애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다. 눈을 뜨고 슬그머니 일어나 두리번거리면 손에 공을 든 친구가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쟤 왜 오버야?' 하는 수많은 눈빛들을 애써 피하며 바지에 묻은 흙을 터는 애가 있었는데, 그것도 물론 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체육 시간이 정말 싫었다. 달리기도 배드민턴도 줄넘기도 다 싫었지만 그중에서도 피구가 제일 싫었다.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언제부턴가 내 나름의 피구 노하우를 만들어내 엄격하게 나만의 규칙을 따랐는데, 그 규칙은 이런 식이었다.


우리 편이 공격을 할 땐, 공을 직접 던져야 하는 안쪽은 절대 안 들어가고 무조건 밖에 섰다. 밖에서도 최대한 중앙선(?)과 가까운 모서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편의 실수로 중앙의 금을 넘어 운동장 저 멀리로 공이 날아가면 잽싸게 그걸 주우러 갔다. 그때 친구들이 애타게 기다리 말든 최대한 여유를 부리며 공을 찾아 돌아왔는데, 살벌한 경기장에서 멀리 더 멀리 걸어가며 느꼈던 그 자유와 해방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비일 땐 공격 편에서 그나마 가장 친한 애한테 은근슬쩍 다가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친구 팔짱을 슬쩍 끼고 구석으로 끌고 가면서 "야, 이따가 경기 시작하면 티 안 나게 나 좀 살살 맞춰주라." 하고 모종의 검은 거래를 했다. 친구 입장에서는 노력 없이 점수를 딸 수 있고, 내 부탁도 들어줄 수 있으니 안 해줄 이유가 없다.


나의 사주를 받은 친구는 경기 초반부터 득점할 생각에 신이 나서 나를 향해 거침 없이 공을 날렸고, (야, 살살 하랬잖아...) 나는 그 공과 내 몸으로 박수를 친다는 마음으로 살짝 공에 몸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하면 좀 덜 아팠다.) 그러면서 최대한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맞은 부위를 쓸어가며 아픈 척을 했다. 그렇게 할리우드 액션을 보이며 정말이지 너무나 아쉽다는 듯 경기장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가 또 열심히 공을 주웠다. 자발적인 '볼 걸 (ball girl)'. 그게 바로 나였다.


나에겐 날아가는 공을 잡는 순발력도, 누군가를 맞춰야 한다는 승부욕도,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해 공을 던지는 기술력도 없었다.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피구라는 스포츠 즐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숨쉬기 운동 외의 그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 뚝심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충동적으로 헬스나 수영이나 요가나 필라테스나... 온갖 것들을 시작했다가 기부 천사가 된 일은 수없이 많다.)



그러니 이런 내가 태권도라고 잘할 리가 있겠나. 없지.


도장을 다니면서 스스로도 탄식한 사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초반에 서기 동작을 배울 때 일이다. 관장님이 나와 마주 서서 "발을 나란히 모아 선 뒤, 발을 틀어 두 발의 각도가 90도가 되게 서세요."라고 말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왼 발을 정면을 바라보게 고정한 상태에서 오른 발만 90도 틀어 ㄴ 자를 만들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양 발을 공평하게 45도씩 벌려 V 자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 없던 도장 바닥에 아주 예쁜 발가락 꽃봉오리 피워낸 것이다. 관장님은 그런 내 발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뿜었다. (그렇다. '뿜었다'는 표현 말고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다.)


그는 내게 자기가 지금까지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이 설명에 나처럼 발로 꽃을 피운 사람은 처음이라며 기가 차했다. 아니 왜 뭐 왜 뭐. 어쨌이것도 90도는 90도잖아. 나 되게 정확하게 90도 맞춘 건데 지금? 나는 처음에 관장님이 뿜을 때도 영문을 모를 정도로 진심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발이 모두 같은 모양인 것을 확인한 후 잠시 의심까지 했다.


'대체 왜 다들 저렇게 발을 만든 거지. 나 몰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또 하나는 이 사진으로 설명하겠다. 보시다시피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 틀리게 따라 하고 있다. (여러분 저 확신에 찬 두 손을 봐주세..요..) 절대 장난치는 게 아니고 나는 진지하게 수련에 임하고 있었고, 심지어 일대 일로 지도를 받는 중인데... 눈 앞에 전신 거울도 있는데... 저러고 있는 게 놀라워 뒤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다. 이러니 나보다 늦게 들어온 수련생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나에게 도리어 태극 1장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는 상황이 가능한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도장에서 가장 어리바리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오죽하면 이런 적도 있었다. 언젠가 다른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범님이 와서 잠시 나를 봐준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했던 설명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가 지쳐서 '김별 님을 가르칠 수 있으면 세상 누구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명언을 남겼다. 처음엔 솔직히 좀 서운했는데, 나중엔 그가 내 덕에 직업적으로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뿌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한다. 피구 일화에서 본 것처럼 내 일생은 몸으로 하는 걸 어떻게든 회피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못하는 건 안 하고 싶었다.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태권도는 달랐다. 누가 봐도 도장에서 제일 못하는 구멍인데. 나보다 열 살도 넘게 어 친구들에게 맨날 쭈뼛거리며 품새를 물어보고, 어제 가르쳐준 걸 또 까먹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또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면서도. 집에 와서 한참을 유튜브를 보며 연습을 해도 다음 날 도장에 가면 몽땅 다 까먹으면서도. 자꾸만 하고 싶었다. 태권도가.


나는 그런 내 마음이 놀라웠고, 다른 어떤 운동과도 다르게 태권도와 나의 인연을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못하는데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은 뭔가 특별하다. 내가 이걸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게 신기하고. 포기의 아이콘인 내가 질척이는 미련으로 도장에 가고 또 가서 서성이는 게 심상치 않다. 살면서 이런 게 또 있을까 싶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답은 간단했다.

'내가 태권도가 좋은가 보네. 그래서 그런가 보다.'


나는 태권도를 향한 내 짝사랑이 귀엽고 애잔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내 마음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아, 사랑스러운 나!)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도 계속 다가가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처럼 뭘 못해도 좋아서 계속하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래는 못하지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 춤은 못 추지만 춤추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했으면 좋겠다.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술자리는 좋아해서 콜라만 마시며 끝까지 남아 자리를 즐기는 유재석처럼 말이다. 잘하지 못해도, 실컷 좋아하기만 해도, 괜찮다는 걸 나는 태권도를 통해 배웠다.


'못 하면 어때. 좋으면 하는 거지. 계속하면 되는 거지.'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도복을 갈아입는다.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맨발에 느껴지는 도장 바닥의 차가운 감촉에 전율한다. 관장님은 그런 내게 다가와 도복도 제대로 못 입은 나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어설프게 동여맨 띠도 다시 매주신다. 나는 속 없게 웃으며 헤헤거린다. 그리고 매앤ㅡ앤 뒤에 서서 저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친구를 보며 할 때마다 새로운 태극 1장을 열심히 따라 한다.


'재...재미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권도는 애들이나 하는 거 아니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