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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Jan 27. 2024

아저씨 탐구하기(1)

이거 봐요 아저씨


아저씨는 결혼 전까지 총각이라고 불렸다.

그 총각은 미래지향적인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미래지향적이던 사람이  방구석 지향적인 신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결혼한 남자를 무조건 아저씨라고 부른다.

결혼만 했다 하면 다 싸잡아 아저씨 범주로 몰아넣는다.

친척이든 이웃이든 길을 지나가는 남자든 무조건 아저씨다.

그 광범위한 포괄성에 이제는 어떤 아저씨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그만큼 푸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웃집 아저씨.

경비 아저씨.

정육점 아저씨.

슈퍼 아저씨.

책방 아저씨. 


모두가 다 아저씨로 통한다.

무엇을 부탁할 때도 아저씨만 세게 부르면 만사형통이다.

부르는 이가 젊으면 젊을수록 이쁘면 이쁠수록 아저씨의 코밑은  길쭉해진다.


 나는 아저씨와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아저씨에 대한 글을 쓰려니 우선 아저씨를 관찰해야 했다.

길에서 앞서가는 아저씨의 걸음걸이, 자세, 옷차림 등을  살금살금 훑어보기도 하고 

우리 집 아저씨를 탐구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로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이라면 "저 아저씨 아무래도 이상해."

신고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이런 태도는  그나마 면죄부가 되었다.

내가 아저씨를 해할 일도 없고, 다른 뜻으로 다가갈 이유도 없다.

그런 점은 참으로 홀가분하고 좋다. 


지난 시간에는 아줌마를 탐구했건만 이번에는 아저씨를 탐구하려니 힘이 든다. 

내가 아저씨가 아니기에 더 그렇다. 

그래도 중석몰촉 中石沒鏃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의 정신으로 글을 써 나가겠다.


아저씨!

그러니까  한 여자의 남편이 된 사람이다.

품절남인 것이다.

총각과 아저씨의 경계선에서 최전방으로 밀려난 아저씨.


자기 남편을 남에게 얘기할 때도 "우리 아저씨가 그랬어." 하면서 남편을 아저씨로 변용하기도 한다. 

아저씨는 자신을 아저씨라 불러주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아줌마가 아닌데 아줌마라 칭하면 발끈하련만 아저씨는  그렇지 않다.


요즘엔 아저씨들이 일제히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일에 팔 걷고 나섰다.(우리 집 아저씬 제외)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냄새나는 음식물 봉지를 들고 나온다. 

그것은 가사노동으로 지친 아내를 배려한 행동이다. 


가사노동이라면 전혀 무관했던 아저씨들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그 일에  동참한건 참 잘한 일이다.

중부지방(복부)이 발달한 아저씨들은 이런 때라도 운동을 해야만 한다.

그렇잖으면 날로 달로 복부는 남산의 보름달을 닮아갈 것이다. 

벨트 구멍을 하나 더 늘리지 않아도 되고 마누라의 환심을 사는 건 덤이다.


아저씨들은 아내가 평소보다 더 가사노동을 해야 할 때도 적극적인 조력자가 된다.

김장을 하기 전에는 거실 한 복판에 널따랗게 신문지를 펼쳐놓고  산더미 같은 마늘을 깐다.

티끌하나 없이 까놓은 마늘은  여자보다 깔끔하고 정갈하다. 


김치 속 재료들을 큼직한 양푼에  쏟아붓고 버무릴 때도 우직한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기필코 여자들이 하기 힘든 경지를 쓱쓱 정복해 버린다.

순식간에 뻘건 김장 속을 버무려놓고 간을 보는 콧구멍이  벌름거린다. 

"음 맛있다."

`역시 내가 버무려서 맛있다고` 스스로 엄지 척을 마누라 턱 앞으로 추켜올린다. 


안 하던 일을  하는 것은 그만큼 태산 같은 보람이다. 

군불 땐 아랫목에 앉아서 `에헴` 조선남자 행세를 하는 것보다 얼마나 떳떳한 노동력인가.

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거 내가 버무려서 맛있는 거라고 생색을 내는 재미는 또 얼마나  

찰진 맛인지.

가사에 동참하는 일은 이래서 동업관계인 마누라와 파업할 일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가사에 동참하는 일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어서 업어주고 싶을 때가 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심기와는 달리 또 엉뚱한 데서 아저씨를 깎아먹는 부분이 있다.

조금 젊은 아저씨는 안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 든 아저씨들은 눈썹이 길게 자란다.

눈썹도 나이를 내세우고 싶은가 보다.

거기다 반은 흑색이고 반은 흰색이다.


묘한 그라데이션은 멋있기보다 산신령을 닮아간다.

그 눈썹으로 지팡이라도 짚고 훠이 훠이 걸어가면 동네 아이들이 다 도망갈 판이다. 

그것은 드물게 하나둘씩 나오다가 결국 다다닥 우후죽순이 된다. 


마누라는 족집게를 들고 그걸 뽑아주겠다고 덤비고 뽑히는 순간 집안은 비명소리로 득실거린다. 

누가 들으면 야매로 이를 뽑는 줄 알겠다.

그건 약과다.

먹는 약과 아니다. 


그럼 뭐가 또 있다고?

코털이다.

코털은 콩나물시루다.

물도 안 줬건만 웬 코털은  뿌리를 밖으로 길게 내밀고 세상 구경을 하려는지. 

정말 생각 같아서는 다 뽑아버리고 싶다.


어둔 동굴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먼지라도 들어오면 그거나 잡으면 그만이다.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고 뭘 또 간섭을 하려고 나대는지.

코털은 아저씨가 고주망태가 되는 날 더 기승을 부리고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싶어 한다.

쌉싸름한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쿨렁대는 순간 그네들도 점프 태세를 갖춘다.


코털도 코털이지만 수염은 또 어쩌라고.

남자들에게 있어 수염은 정말 귀찮은 부속품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는 수염은 부지런하지 않으면 며칠 만에 수북이 새순을 올려놓는다.

비 온 뒤 봄 들녘에 솟아나는 생동감 있는 냉이며 쑥이다. 


아침마다 면도기를 들이대도  그것들은  정말 줄기차게 솟아난다.

아무리 면도를 했어도 딸바보인 아빠들에게 수염은 치명적인 경계선이다.

꽃잎처럼 보드라운 어린 딸의 뺨에 쇠수세미 질감의 턱수염은 어울리지 않는다. 

몇십 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아버지의 거칠었던 수염세례를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아저씨들에게 수염은 오로지 귀찮은 철조망일 뿐이다.


아저씨!

"이거 봐요. 아저씨."

"아! 왜 자꾸 불러."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날 것이니  눈썹, 코털, 수염 내려오는 순서대로 3종 세트 좀 잘 관리하고 

집을 나서길 바라오.


긴 눈썹, 삐져나온 코털, 덥수룩한 수염.

이거 이거 아주 볼썽사납단 말이오.

그런 차림으로 함께 밥을 먹고 있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소화가 안된단 말이오.

아줌마를 대표해서 아저씨들에게 고하노니 꼭 용모를 단속하고 밥상 앞에 임하시길.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그럼 나도 한마디 할까?"

"뭔데?"

"자동차를 톡 하고 치면 뭐게?"

"뭐긴 뭐야. 카톡이지."


할 말 없으니 아재개그로 무안한 거 땜질하지 말고. 

알려준 장소?를 잘 손질하고 반듯한 자세로 밥을 먹자고.

"알았죠? 아저씨."




 독자님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매주 수요일에 글을 올립니다.

그렇다면 원래 글을 올려야 할 날짜는 1월 31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올린 까닭은  잠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어요.

부득이하게 앞당겨 글을 올리게 되었지요.

드디어 여행 보따리  성~공.

2월 7일 수요일에 또 뵙겠습니다.


교토 1 굴 착수~~

잘 다녀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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