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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부메랑 Sep 12. 2020

제발 과거를 묻지 말아 주세요

내담자의 과거는 생각보다 강하다

 아침 7시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최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이 곳 캘리포니아는 연일 40도를 넘는 온도를 기록하고 있다. 잠도 제대로 못자서인지 거울을 보니 눈이 퀭했고, 머리가 무거웠다. 샤워를 하고 간단히 토스트와 감자로 아침을 먹었다. 오늘 일정을 보니 대부분 트라우마로 힘들어하고 있는 내담자들의 세션들이 연이어서 예약되어 있었다. 드립 커피를 빈 컵에 붓고,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와 향기에 집중하며 잠시 기분을 전환했다. 커피 향기와 진한 갈색의 커피는 내게 생각을 전환시켜주고 동기를 부여해 주는 힘을 갖고 있다. 디카페인 커피도 동일한 향기와 색을 지녔지만, 디카페인 커피를 먹을 때는 그런 효과가 왠지 모르게 반감되어서 디카페인 커피는 먹지 않는다. 거의 매일 뻔한 뉴스들로 가득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훑어 본 뒤, 남은 커피를 천천히 다셨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 오전 세션들은 꽤 적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심리상담사로서 매 세션에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임하지만, 상담은 상담사만의 퍼포먼스는 아니다. 심리상담사와 내담자가 협동해서 실타래를 꼬아가듯이 만들어 가는 시간이다. 따라서 내담자의 의지와 자세도 무척 중요한데, 상담사로서는 상담사인 나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협력적인 태도로 상담에 임해주는 내담자와의 상담이 상대적으로 효과적으로 진행된다고 느껴진다. 아무리 증상이 경미한 내담자라도 상담사와 협력하려는 의지와 신뢰가 없으면 상담사도 점차 지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아무리 증상이 심각해도 내담자가 상담사를 존중하고 상담사와 협력해서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상담을 진행해 가는 상담사도 더욱 탄력과 힘을 얻는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오전 마지막 내담자 M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M은 40대 후반의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아동학대를 받았고, 10대에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트라우마와 약물중독으로 보내온 내담자이다. 다만, 오늘로서 이 내담자를 5번째로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히스토리에 비해서 상담에 임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협력적이고 상담사인 나와의 라포 형성에 노력하는 느낌이 들어서 나로서도 세션이 진행될수록 그녀의 케이스에 몰입이 되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그런 효과가 생기고 있었다.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녀는 가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쉽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협조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2주 전에는 어디서 그런 잘못된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세션 중 내게 "혹시 제 담당 상담사가 바뀌나요?"라고 신경질적으로 물어봤다.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녀는 "저는 상담사가 바뀌는 것이 너무 싫어요. 상담사가 바뀌면 제 지난 이야기들을 또 이야기해야 하고, 그런 것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어요. 나는 여기 상담사와 친구가 되려고 온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흥분했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앳된 얼굴, 대체적으로 보이는 순수한 성격과 사고방식, 그리고 겪지 않아도 될 슬픈 경험을 하고 이제부터라도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의지를 되살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면 자연스레 공감, 아니 공감 이상의 느낌이 들었고, 나로서도 뭐라도 상담사로서 더 많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세션 기록을 검토하면서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검토되어야 할지 등을 생각해왔다. 그리고 지난 주 슈퍼바이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불필요하게 왜곡된 생각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지난 주 세션 말미에 다음 주 세션에, 즉 오늘, 인지행동치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말을 했었고 그녀도 그 말에 동의한 뒤 세션을 마쳤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푼 채로 초록색 상의에 노란 색 바지를 입고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에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취직했다고 하며 살짝 부끄러운 듯 웃었다. 취업을 축하하며 간단히 아이스브레이크 시간을 가졌다.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졌다고 느껴져서 나는 지난 주에 이야기했던 인지치료행동에 대해 말을 꺼내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 주에 이야기한 그녀의 완벽주의를 지향하려는 태도에 대해 질문을 했고, 오늘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무엇을 할지 간단히 설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리고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말했다.


"저 사실 지난 주에 세션 후에 기분이 안좋았어요"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네? 왜 그랬는지 말씀해 주실래요?" 그러자 그녀는 자신에 대해 완벽주의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대화가 진행되었고 그 직후 마치 자기 자신이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날 저녁 내내 기분이 안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점차 더욱 흥분했고, 얼굴이 빨개져서 거의 울먹이듯이 "나는 사실 인지행동치료가 싫어요 왜 자꾸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게 마치 어떤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분석을 해야 하죠? 나는 그게 너무 불편해요"라고 외쳤다.


잠시 나와 내담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난 주에 분명히 좋은 분위기에서 세션이 진행되었고, 내담자도 인지행동치료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오늘 이 방법을 사용해서 세션을 이어가고 싶다고 동의했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나로서도 어안이 벙벙했고, 혼란스러웠다.


눈물만 안 흘렸지 거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말했다. "지난 주에 오늘 이런 부분을 함께 이야기하자고 해서 준비했어요. 내담자님이 싫으시면 안 하셔도 좋습니다.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도 안심한 듯 안색이 다시 회복되었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스스로 안정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을 분석하는 것은 너무 괴롭고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신은 이제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일 뿐이라며, 현재 여기서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그녀를 달래주고, 그녀의 말에 대해 수긍한다는 표현을 한 뒤, 남은 시간은 모두 그녀가 최근 하고 있는 일들, 이슈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세션을 마무리했다.


세션 말미에 그녀는 아까 자신이 흥분하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미안했는지 "상담사로 일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대단하시군요.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요"라고 나를 격려해줬다. 그녀의 말은 알맹이가 없는 겉치레 인사는 아니었다. 그 '쉽지 않음'이 뭔지에 대해 나도 오늘 조금은 더 배운 것 같다.



사무실을 나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보았다. 그녀는 마치 작은 소녀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휴게실에 가서 캐러멜을 하나 먹었다. 그리고 비서가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를 컵에 부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윤곽이 보다 뚜렷이 잡혔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내게 화를 낸 게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극도로 겁을 냈다. 그리고 왜 그녀가 2주 전에 자신의 상담사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싫다고 말했는지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을 극도록 싫어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다. 심리상담사 같은 사람들이 그런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고 다가와서 그런 과거를 마주하고 과거를 재구성하게 하고 그녀를 앞으로 나가도록 하려는 계획은 사실 그들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많이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종종 저널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함부로 과거를 접촉시키도록 하는 프로이드의 정신역동이론이나 자신의 인지왜곡을 분석하게 하는 인지행동치료가 생각보다 부작용이 발생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본 기억이 솟구쳤다. 물론 정식역동 이론과 인지행동치료로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많고, 그 이론과 치료법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기계수선공의 마인드로만 접근하는 것도 재고해 봐야할 때가 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찾고, 그 문제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접근법은 암세포를 찾아 그 세포를 제거할 때는 효과가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다루는 데는 항상 효과적이지만은 않다. 사람은 기계나 로봇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그녀는 오랜 시간을 학대받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서, 젊은 시절에는 남자에게서. 생존을 위해서 그녀는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의 벼랑 끝에 서있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절대적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고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경험은 그녀를 '나는 언제나 문제나 결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강박관념을 갖게 했고, 누군가가 그녀의 단순한 점을 살짝 지적만 해도 (예를 들어 "오늘 2분 늦게 왔네요") 그것은 단순한 그녀의 행동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그녀의 인격과 삶의 자격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어서 그녀를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오늘 제가 드디어 운전면허증을 땄어요"라던지 "오늘 제가 만든 요리가 맛있었대요"라는 식의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녀에게 이런 성취와 성과는 단순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 문제없이 잘 나아가고 있고 제대로 살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생존에는 큰 위협이나 문제가 없다는 것을 순간적으로나마 확인받고 검증받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지난주에 "당신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을 했으니 그녀는 그 말을 "당신은 완벽주의라는 큰 문제가 있어요, 이것이 당신의 생존에 위협이 될 것입니다"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인지왜곡 리스트를 가지고 각종 인지왜곡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으니 마치 자기가 왜곡 덩어리의 존재로 그 실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연히 불안도가 급상승해서 순간적으로 공황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과 심리가 어떠했을지도 깊이 짐작이 된다.


테이블에 있던 커피가 식어서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고소한 커피가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내게 협력적이고 상담에 대한 동기부여가 충분히 돼 보인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그녀를 이미 다 안다고 착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호협력과 존중에 대한 기대를 했었지만, 정작 나는 상담사로서 그녀를 아주 깊이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에서라도 이렇게 그녀를 더 깊이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녀 안에 얼어붙은 듯 있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를 내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닌지. 그 소녀에게 더 충분한 자유와 시간을 주어야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녀의 과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여기에서 그녀가 어떻게 삶을 엮어 가는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그녀의 현재와 과거를 존중해야겠다.


운전면허증 받은 M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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