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보기 아까운 육아의 순간을 나눠요. 이.맛.육#10
어른들의 취향은 좀처럼 바뀌는 법이 없다. 곧 죽어도 아메리카노는 아이스로 먹어야한다는 숱한 어른들 덕분에 ‘얼죽아’라는 말이 관용어가 된 것처럼. 하지만 모든걸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이들은 다르다. 어린 나이의 아이를 키우다보면 생각보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확확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바다 속 세계에 빠져있다. 인기있는 아동도서 [바다100층짜리 집] 덕분인데, 그래서 온 집안이 바다로 변신하기 일쑤다. 갑자기 아이들 중 누군가 "엄마는 해파리, 똘군이는 고래야. 똘양이는 소라게!"라고 외치면 “어 알겠어. 안녕 고래야? 나는 해파리야”하고 역할놀이가 시작된다. 대부분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 놀이에 끌려다니지만, 가끔 아이들의 황당한 상상력 덕분에 머릿속 깜깜했던 전구가 번쩍 켜지는 순간들이 있다.
얼마 전 저녁 산책하다가 더위를 피해 아파트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던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어두워지면 불가사리가 나타나요"
"응? 불가사리? 별 말하는거야?"
"근데 별이 불가사리가 되는거에요. 하늘이 슬프면 물이 가득차잖아요.
그래서 비가 내리지요? 그럼 바다로 바뀌고 별이 불가사리가 되는거에요. 몰랐죠?"
비가 내리는 날은 하늘이 슬픈거고, 그래서 하늘은 물로 가득차는거고. 그리고 별이 불가사리가 되는 세상.
어딘가 웨스 앤더슨이나 팀 버튼 감독의 환상적인 판타지 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설정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 때 나는 개봉하는 영화는 거의 다 찾아보는 사람이었는데, 출산 후 영화관은 커녕 한편의 영화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엄마로 살면서 개인의 취미생활까지 찾는 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관에 못가면 어떤가. 내 인생은 지금도 충분히 풍요롭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을 감고 아이가 만들어낸 세상에 풍덩 몸을 담궜다.
“우와….그런거였어? 엄마는 몰랐네. 알려줘서 고마워.
불가사리가 별이 되는거였구나.”
아이 세상의 입장료는 "엄마는 몰랐네" 한 마디다. 이 말은 마법처럼 효과가 있다. 엄마가 모르는 걸 알려줬다는 뿌듯함에 어깨가 으쓱해진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새 제법 어둑해진 하늘에 옅게 빛나는 별, 아니 불가사리가 보인다. 보글보글 물거품도 보이는 것 같은 초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치의 스트레스도 같이 하늘 위 물거품으로 날려본다.
25.09.04
P.S. 밤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쌓인 집안일을 하고, 새벽녘 잠들면서 며칠전 아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면 제 세상엔 별이고 뭐고 없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나마 한번씩 하늘을 보고, 근심걱정없는 세상으로 도망쳐봅니다. 오늘 하루 힘드셨다면, 오늘은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세요. 여러분의 눈에도 별이 불가사리로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