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회귀 Nov 18. 2023

신기루

의지가 기적을 만나는 새벽

눈타령하는 나만 보라고 새벽에 소리 없이 완벽하게 내려준 2023년의 첫눈.




월요일, 후배를 만나 11월 중순의 따뜻한 남쪽지역 카페에 앉아 눈타령을 한다.

화요일,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구름을 보며 설경을 떠올린다.

수요일, 금토요일에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체크아웃하기로 정한다.

목요일, 제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 더 묵을 숙소를 찾다가 비행기예약변경을 선택하고 탑승한다.

금요일, 지인들과 얘기 중 이번 겨울에는 꼭  눈을 보러 어딘가로 갈거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리고 토요일, 내 삶의 보금자리에서 첫눈이 함박눈으로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다.


'눈'예보를 알리는 안전자가 왔다. 그것도 새벽 3시에 온단다. 눈! 눈! 눈! 해서였을까! 보일 듯 말 듯 흩날리는 눈에''이라고 뛰쳐나가는 이곳에서 '11월에 눈이 온다고?' 하며 웃어넘겼을 문자를 보고 알람을 맞춘다. 2시 55분. 침대에 누워 다시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5시로 눈 예보가 늦춰져 있다. 4시 55분으로 알람을 재설정한다. 벌써 새벽 2시인데.


알람소리에 1초의 미적거림도 없이 일어나 창문을 연다. 함박눈이 강한 바람에 45도쯤 누워서 온 세상에 내려앉고 있다. 설렘에 급분주해진다. 늘 그렇듯 언제 눈이 왔냐는 듯 신기루 같은 이곳의 눈을 놓치고 싶지 않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난방기를 서재로 옮겨 전원을 켜고, 담요도 챙긴다. 창문을 반쯤 열고 지정석에 앉아 담요를 덮고 따뜻한 차 한 모금 넘기며 바라보는 세상은 행복함이 한도초과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기회를 줄 테니 마음껏 행복해봐' 하는 것 같은 눈의 기대에 부응하듯 맘껏 취한다.


따뜻한 몸과 눈바람에 차가운 공기의 절묘한 비율은 내가 좋아하는 겨울 분위기다. 기적 같은 행복의 순간은 예상보다 긴 듯 짧다. 5시 20분이 되니 눈이 내리지 않는다. 창문을 좀 더 열고 마음에 겨울을 담는 사이 창가에 앉은 눈의 포근함이 반쯤 내려앉았다. 아파트 화단 가장자리부터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인도는 벌써 촉촉이 비로 바뀌고 있다. 해도 뜨기 전인데 성격 급한 경상도 눈답다. 그래서 더 눈의 신비주의 전략은 항상 옳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것에는 반드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그 기회를 알아차리고 내 것으로 만드는 준비된 의지가 있어야 내 것이 되는 거구나. 새삼 기적 같은 첫눈을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의지에 기특함을 느끼며 한껏 으쓱여본다.


다시 일어난 주말의 아침은 햇살 눈부신 완벽히 화창한 날이다. 역시 신비주의 전략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가.




신기루를 만나기 위한 하루사리의 완벽했던 한 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