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 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네만, 나는 누군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라 말하리.
모든 이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기란 어렵잖은 일이니,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뛰어넘은 헬레네도 뭇사람 가운데 빼어난 지아비 버리고
배에 올라 트로이아로 떠났으니까. 제 딸과 사랑하는 어버이를 까맣게 잊었다네. 아프로디테께서 그녀를 홀리셨으니 [ ]
(…) 구부리어 (…) 마음을 (…) 가벼이 (…) 생각하지. 이에 나는 떠올리네, 지금은 떠나가고 없는 아나크토리아를.
나는 그녀의 사랑스런 걸음걸이, 얼굴에서 빛나는 불꽃을 더 보고프다네, 뤼디아의 전차와 중무장 갖춘 보병을 보기보다는.
※ Reproduced with permission of the Licensor through PLSclear.
※ Rayor, Diane J., trans. & ed. Sappho: A New Translation of the Complete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 2023. Introduction and notes by André Lardinois.
파리스를 따라가는 헬레네(BC 350-320). 왼쪽부터 말을 타고 떠날 준비를 하는 파리스, 베일을 벗어 얼굴을 드러내는 헬레네가 있고, 헬레네 뒤에는 아프로디테가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래에는 날개 달린 사랑의 신 에로스가 거위를 쫓는 사냥개의 목줄을 잡은 채 헬레네를 올려다보고 있다.
<note> 트로이아 전쟁 신화를 소재로 삼아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사랑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사포는 대답한다, 웅장한 함대나 전차 부대 등 온갖 "남성적"인 것들을 제치고, 누구든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이 시의 화자(사포?)는 아나크토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는데, 그 마음을 신화 속 인물인 헬레네가 파리스에게 품었던 열망에 빗대었다. 남편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를 버리고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를 따라간 헬레네의 비행은 트로이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희랍 문학에서 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헬레네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가 결코 자의로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며, 파리스를 돕기 위해 나선 아프로디테와 그를 수행한 에로스(사랑), 페이토(설득의 여신)가 헬레네를 홀려 그리 되었을 뿐 헬레네 역시 사실상 희생자라고 변호하지만, 어쨌든 그 행위 자체를 그릇된 것으로 보는 데는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 단편에서 화자는 헬레네가 느낀 사랑의 감정을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하며, 아나크토리아를 향한 자신의 그리움과 동일시한다. 물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라는 식의 불륜 미화일 수도 있지만, 이 세상 그 어떤 화려하고 근사한 것들을 다 제쳐놓은 채 오로지 사랑하는 이만 보고픈 감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사포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불륜이 나오고 동성애가 암시되지만 이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진 않는다.
* 뤼디아(리디아) : 사포의 고장 레스보스 섬에서 바로 해협 건너편, 오늘날의 튀르키예 서부에 있던 뤼디아 왕국은 당대 최고의 부국으로서 온갖 사치품의 생산지였으며 흘러넘치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 사포의 여러 단편에서 뤼디아는 풍요와 화려함의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이 시에서처럼 주로 사포가 더 가치있게 여기는 대상을 강조하기 위한 비교 대상 역할을 한다.
리디아 지도. 그림의 "트로이" 아래 쪽에 있는 휘어진 모양의 섬이 사포의 고장 레스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