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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숲 일기(13)

한숲 이야기 / 에세이

by 김창수

37. 토성(土城)

산책하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시간과 거리에 따라 다양한 산책 코스를 만들었지만,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역사적인 자랑거리인 처인성(處仁城)이다. 이 도시의 근간이기도 한 토성은 실제로 작은 동산처럼 보인다. 지금은 시에서 유적지로 새로 단장을 해서 나름대로 토성으로서 위용을 자랑하지만, 처음 이사 와서 가 본 그곳은 토성이라기보다는 벌거벗은 뒷동산 정도로 초라했다.


토성을 빠지지 않는 코스로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곳을 올라가면 높지 않은 곳인데, 사방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몽골군을 물리친 작전상 요충지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토성 옆으로 나 있는 길지 않은 둘레길은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돌 수 있는 편안하고 아늑한 길이다. 둘레길 중간에 있는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토성을 덮고 있는 잔디들은 어린이들의 자연 놀이터이다.


이곳을 거닐 때마다 흙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토성 위로 올라가서 신발을 벗고 한 바퀴 돌면서 흙 밟기를 한다. 손을 하늘을 향해서 뻗고, 저 아래 보이는 곳을 향해서 고려 때 승장처럼 승리의 환호성을 외치며, 역사 속으로 잠시 빠져들어 본다. 반대편에 보이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태양과 함께 저물어 간다. 토성은 또 다른 내일을 열기 위해 거대한 아파트를 품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38. 빵집

처음 빵을 먹어 본 기억은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때 옥수수빵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외국에서 옥수숫가루를 원조받아 학교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나눠줬다. 제과 회사에서 나오는 크림빵을 맛있게 먹은 적도 있었다. 그 이후 빵을 즐겨 먹지 않았다. 빵이 싫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신체에서 거부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빵을 싫어했던 것으로 봐서는 유전적 요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외국에서 근무할 때 주택가 근처에 바게트를 아침마다 구워서 파는 빵집이 있었는데, 그 냄새가 동네를 진동하여서인지 바게트가 나오는 시간에 긴 줄을 서야 살 수가 있었다. 러시아의 호밀빵(흑빵)도 따뜻할 때 먹으면 구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딱딱해져서 먹기가 힘들다. 가끔 생각이 나는 빵들이다. 한국 생활을 하면서 잊어버렸던 빵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한숲에 이사 와서 여러 개의 빵집이 들어오면서였다.


나이가 들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술 먹을 일도 없어지면서, 저녁에 일찍 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빵을 사러 간다. 빵집에 들어가면 빵 냄새가 코를 호강시켜 준다. 오븐에 갓 구워 나온 다양한 빵 중 몇 개를 골라 집에 와서 우유와 함께 먹는 빵은 이제 주식이 되었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빵과 우유는 한숲에 와서 체질이 바뀌었는지 또 하나의 먹거리로 자리를 잡고 있다.


39. 환자와 의사

한숲에 입주하면서 가장 걱정이 된 것은 그동안 다니던 병원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픈 데가 많아졌다. 눈도 나빠지고. 이도 시원찮아지고,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이곳에 개원한 병원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당분간 다니던 병원으로 가면 되지만, 교통도 불편했다. 병원이 생기더라도 의사와의 소통, 그동안 병원 기록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1년여 기존의 병원으로 다니면서 한숲에 있는 병원을 하나씩 바꿔나가기로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이 치료였다. 처음 방문한 치과는 깨끗한 인테리어, 새로운 장비, 친절한 의사 덕분에 장기간의 임플란트 대공사를 마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숲에도 많은 병원이 들어왔고, 그 숫자만큼 다양한 진료과목이 생겼다.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하는 병원을 찾는 것도 중요했다. 몇 군데를 가보았지만, 다녔던 병원과 비교를 해서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임상 강의 첫 시간에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가 병 치료에 가장 중요하다는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과거의 병원은 잊어버리고,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환자의 피검사 데이터를 정확히 분석해서 필요한 약을 처방해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예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의사를 선택했다. 내과 의사인 친구의 인기 비결은 동네 아저씨 같은 구수한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안다. 한숲의 모든 의사가 같은 가족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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