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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Apr 12. 2024

4화. 나나이모 공항(空港)의 새벽

공항 이야기 / 에세이

  오랫동안 여름휴가를 어김없이 캐나다의 작은 도시, 밴쿠버섬에 있는 나나이모로 갔다. 직항이 없어 밴쿠버 공항에서 내려 국내 항공인 소형 비행기를 타면 나나이모 공항에 도착한다. 가끔 호슈베이(Horseshoe Bay)로 가서 BC Ferry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푸른 바다와 멀리 눈이 쌓여있는 높은 산을 보면서 갈 수 있다.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수상비행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소형 비행기를 타고 바다 위로 20여 분 남짓 날아가면 밴쿠버 건너편 나나이모의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활주로 근방에는 자가 경비행기들이 많이 보였다. 대형 항공기가 착륙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공항이지만, 안락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비행기는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 착륙해서 더운 바람을 피해 바로 집 같은 느낌을 주는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시 후,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나이모를 처음 온 것은 해외에 근무할 때, 가족과 여름휴가를 오면서 인연이 되었다. 밴쿠버와 달리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뿜어 나오는 깨끗한 공기로 전 세계 부호들의 별장들이 많다. 태평양 아열대 환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가 내리는 온화한 기후의 섬이어서, 캐나다 동부에 많은 은퇴자가 정착해서 사는 곳이기도 하다. 환락가도 찾아볼 수 없어, 가족과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다.

  섬에는 고급 주택들이 해변을 중심으로 몰려 있고, 마리나(요트 정착장)에는 그들이 타고 다니는 다양한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거리에는 오픈카들과 대형 오토바이족들이 우렁찬 엔진 소리를 내며 질주한다. 숲 속이나 해변의 캠핑장에는 다양한 캠핑카들이 가득하다. 겨울에는 눈 쌓인 설원에서 스키와 보드를 타고, 저녁에는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캠프파이어의 불을 보면서 와인을 즐긴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 관계로 어릴 적부터 외국인 학교에 다닌 아이들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해서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당시 한국에는 유학 붐이 한창일 때라 주변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을 ‘외국에서 적응을 못 해서일까?’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치부했다. 아이들에게 외국에서처럼 하고 싶은 것 하라는 말로 위로했다.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학교에 잘 다녔다. 

  아이들이 적응할 무렵 어느 날, 큰아이가 밤에 광화문에 촛불집회 하러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교육행정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가장 큰 이유는 공부에만 얽매이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사교육 문제였다. 아이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좋아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밴쿠버섬을 여행했다. 섬 서쪽 태평양 연안에 있는 토피노에서 캠핑도 하고, 남쪽에 있는 BC 주도인 빅토리아에서 해산물을 먹으러 갔다. 배를 타고 주변의 섬으로 가서 피크닉을 하고, 날씨가 어두워지면 넓은 가든에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냄새가 동네를 진동시키면서, 강아지들이 킁킁거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참지 못하겠다는 아우성으로 합창을 했다.

  아이들은 하루가 피곤했는지 잠자리를 찾아가고, 아내와 오랜만에 둘이 2층 테라스에 앉아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 있는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쏟아지는 유성들을 피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눈부신 밝은 햇살에 잠이 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곳이 신이 숨겨 놓은 마지막 지상의 낙원이라 생각했다.          

  나나이모는 골프 하기에 좋은 곳이다. 휴가 기간 중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에 골프를 했다. 골프장은 예약이 없어도 대기 명단에 올려놓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현지인들과 라운딩을 할 수 있다. 골프장들은 주로 주택가 중심에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젊은 골퍼는 백을 메고, 중년들은 핸드 카트를 끌고, 노인들은 카트를 타고 라운딩을 한다. 운동 삼아 핸드 카트를 빌려 18홀을 걸어 다녔다.

  어느 날, 대기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는데, 마이크로 이름을 불렀다. 동반자는 노인들이었다. ‘안뇽하셔요?’ 하면서 어눌한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한국어는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한국전쟁에 참여해서 배웠다고 했다.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대한민국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고, 훌륭한 나라에 내 젊음을 바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찡했다.     


  어느 순간 새벽이 싫어졌다.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새벽이 오면, 또다시 오랜 시간을 그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 머리가 몽롱해졌다. 짙은 안개가 낀 공항을 잠이 덜 깬 가족과 함께 가는 길이 올 때는 천당이었는데.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간혹 반대편에서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을 보며, 다시 차를 돌리고 싶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질까?’라는 고민을 할 때였다.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가족’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떠올렸다. 사진으로 보고, 가끔 통화하는 목소리는 한계가 있었다. 집 근처에 있던 슈메이너스 벽화마을을 방문했을 때, 많은 그림 중 눈에 아직도 생생한 원주민 가족 얼굴을 그린 벽화가 각인되어 있다. 그들의 무표정한 모습에도 따뜻한 가족의 정이 보였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원시생활에도 꿋꿋하게 그들의 삶을 가족과 함께 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 나나이모 공항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첫 비행기라 아직 공항은 한산했다. 문을 연 카페에 앉아 게이트 오픈을 기다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은 아내 옆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었다. 또다시 1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울컥했다.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면서, 가족과 포옹을 했다. 이번이 마지막 공항의 새벽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나이모 공항의 하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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