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야기 / 콩트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중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어머니가 봉투와 함께 주소를 주면서 그 집 어머니께 전달하라고 했다. 그 집은 대문이 상당히 큰 한옥이었다. 담장 위로는 철망이 처져 있었고, 담벼락에 목련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대문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심부름 왔는데요.”
그 집 어머니에게 봉투를 전해주고 방에서 나오는데, 소녀가 ‘엄마! 학원 다녀올게.’라고 인터폰에서 흘러나왔던 그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는 길게 땋아서 가느다란 목을 가렸고,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동자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눈이 마주칠까 봐 곁눈질로 본 그녀의 첫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심부름은 내가 그 소녀의 집이 이사한, 근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매월 다시 시작되었다. 꾸물거리던 날씨가 소나기로 변했다. 비를 맞으며 찾아간 집은 커다란 양옥집이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우산을 쓰고 나와 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2년 전과 달라진 모습은 단발머리와 얼굴에 보이기 시작한 여드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는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밝은 얼굴로 반기며, 그녀의 어머니에게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옷이 많이 젖었네!”
그녀의 안내로 거실로 들어갔다. 젖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교복을 벗으라고 하면서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서 흠칫 놀란 건 그녀였다. 내가 그녀를 훔쳐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그녀의 이름이 J라는 것을 알았다.
"심부름 다녀와라. “
어머니의 이야기는 나를 들뜨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왜 심부름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도 혹시 지난번처럼 J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도, 그녀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지난번같이 절대 떨면 안 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왜 가슴이 이리 뛰는 거지?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나를 맞이해 준 사람은 다행히 J였다. 여름이라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면서,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가슴이 뽀얗게 올라와 있었다. 그녀의 긴 다리에 시선이 고정되면서, 청바지 스커트는 내 시선을 잡아서 놓지를 않았다. 나는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참을 수 없이 떨렸다. 그녀가 조금씩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걸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J는 새로운 직장 생활이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갓 제대해서 복학한 나에게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빨리 졸업해서 취직해. “
J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순수함이 성숙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쁜 사회생활로 그녀와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끔 들려주는 주변 친구들의 결혼 이야기와 회사에서 많은 사람과의 대화들이 그녀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녀가 바쁘다는 이유로 만남이 뜸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저녁에 보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다. 얼마 후, 그녀에게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을까?”
“······”
그녀가 무심히 던진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카페 주방에서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집에서는 빨리 결혼하라고 하는데······”
그녀는 오랫동안 내 곁에서 위성처럼 맴돌았고, 나는 그녀가 영원한 나의 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와 같이했던, 짧지 않은 세월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듯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힘없이 뱉은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그녀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J를 잡아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보여줬던 나의 나약함이 이제는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먼 길을 면회 온 그녀를 돌려보내고, 외박증을 찢어버렸던 나를 여러 번 후회했다. 그녀가 집으로 가면서 외로움과 갈등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10여 년간 그녀와 만나면서 헤어지기 싫어 이 언덕길을 걷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J의 집이 점점 다가오면서 그녀가 낀 팔짱이 더욱 강하게 느껴져 왔다. ‘이대로 J와 멀리 도망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를 원망하는 감정을 억누른 채,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그녀와 마지막 이별의 키스였다.
그녀와 헤어진 후, 오랫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괴로움은 알코올로 치유가 되지 않았다. 고통의 터널에서 벗어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가슴앓이가 다시 도졌지만, 전과는 달랐다. 좋아했던 S 선생님이 내가 군대 있을 때,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친구를 통해 들으면서 힘들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J의 결혼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응어리졌던 내 가슴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서히 잊혀갔다.
첫사랑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프고, 오래 남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가슴앓이를 하면서 살아가기도 하겠지. J의 잘못도 아니고, 원망할 이유도 없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J가 문뜩 생각날 때면, 그녀의 마지막 슬픈 눈망울과 뜨거운 입술이 그리워진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집 마당에 하얀 목련이 피면 독감 예방주사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