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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Jul 05. 2024

16화. 풀코보 공항(空港)의 환상

공항 이야기 / 에세이

 예정에 없던 반도체공장 합작 생산법인 설립을 위한 사전 조사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원래 계획은 러시아 정부에서 현지 자치공화국의 공장을 추천해서 자치공화국 대통령과 면담 후 공장방문을 마친 직후였다. 급하게 이뤄진 일정으로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를 제공해 주었다. 대통령이 반도체공장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 그 지역에 유치하고 싶었던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겨울이라 러시아는 오후 4시경이면 해가 떨어졌다. 날씨도 영하 30도를 밑돌고 있었다. 풀코보 공항에 눈이 내렸는지 멀리 보이는 활주로 주변이 밝게 비추는 조명에 의해서 환하게 보였다. 소형 비행기의 기체가 착륙하면서 조금 흔들렸으나, 불안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비행기는 공항 청사 앞에 멈추어 트랩에서 내려 바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보안 요원들에 의해 아무런 절차 없이 대기하던 차량으로 이동했다. 풀코보 공항의 외부는 현대식으로 굉장히 웅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칠흑 같은 밤과 하얀 밤이 혼합된 환상의 도시이다. 겨울의 불 꺼진 추운 도시를 경험할 수 있고, 여름의 해가 떠 있는 백야(白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러시아의 두 번째 도시이자, 러시아 제국 시절의 수도다. 서구 지향적인 표트르 대제 1세가 만든 도시로, 1713년~1918년까지 200여 년간 제국 러시아 시절의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유네스코에 등록된 건축물과 문화 기념물이 4,000여 개가 넘는 문화의 도시이다. 강과 늪지 위에 건설돼 북유럽의 베니스로, 여름철 해가 지지 않아 백야(白夜)의 도시로도 불린다. 

  이곳은 질곡(桎梏)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도시의 이름이 제정(帝政)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다. 이곳은 20세기에 러시아의 노동운동 및 공산혁명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1905년 러시아 제1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1917년의 2월 혁명(피의 일요일) 그리고 10월 혁명이 결행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 성공을 거둔 곳이어서 ‘3개 혁명의 도시’라고도 한다.      


  오래전 러시아가 개방되면서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사회주의국가였던 러시아의 실상을 보았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물의 웅장함과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장벽에 갇혀 있던 인민들의 모습에서 괴리(乖離)를 느꼈다. 추운 겨울이어서인지 그들은 남루해 보였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에서 느낄 수 있는 슬라브 민족의 애수와 허무가 서려 있었다. 반면에 대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들어가기 전의 그들의 모습과 공연장의 의상과 표정은 전혀 달랐다. 무엇이 러시아인들의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의 냉랭하고, 겨울 날씨만큼이나 차가웠던 인상은 여름이 되면서 따뜻하게 변했다. 그들의 원래의 모습인지 아니면 처음 느꼈던 것이 변했는지 모르지만, 슬라브족인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갔다. 은둔의 나라 러시아에서 발견한 성과는 한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술이었다. 무선통신, 방산(전투기 등), 핵 분야 기술 등은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조금씩 드러났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 간 러시아에서 그 당시 첨단 기술을 보면서 탐이 났다. 그런 기술을 그들이 필요한 상품과 연결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벌써 40년이 흐른, 기억이 희미한 이야기이다.      

  러시아 정부에서 추천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업체는 이미 반도체 사업을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해놓은 상태였다. 반도체공장도 일부 가동이 되고 있었으나, 기술과 자금의 문제가 벽에 부딪히면서 합작파트너를 구하는 중이었다. 오래전 경험했던 러시아 비즈니스와는 차원이 다른 경쟁 업체들과도 충분히 해 볼 만한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중앙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 들어와 러시아 주재원으로 러시아 방산 공장과 및 군수 기지가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고리키)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은 정부에서 발행하는 비자가 없이는 국내인들도 들어갈 수 없는 도시였다. 순 혈통의 러시아인들만 살아서인지 도시 전체가 하얀색의 환상을 느끼게 했다.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첨단 사업을 다시 펼친다는 생각에 어두운 밤을 지새웠다. 호텔 창가에 펼쳐져 있는 페테르고프궁, 피의 사원에서 환한 불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꿈의 도시, 바다의 도시, 아름다운 문화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환상은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현지에서 장만한 털모자를 쓰고, 풀코보 공항으로 향했다. 며칠간 마신 보드카와 여독으로 마음은 피곤했지만, 몸은 가벼웠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LED 전구가 대낮처럼 밝혔다. 불빛 사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환상이 공항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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