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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Jul 12. 2024

17화. 신치토세 공항(空港)의 맥주

공항 이야기 / 에세이 

  홋카이도 여행은 아내와 약속의 시작이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내는 일본 출장을 갈 때마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공무(公務)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에 출장 다녀오면서 일본의 맛있는 과자나 양갱을 사다 주었다. 출장지역은 주로 도쿄로 은퇴하면 아내와 일본의 4개의 큰 섬인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를 네 번에 나눠 여행하고 싶었다. 

  오래전 아내와 대마도 여행은 해봤지만, 본격적인 일본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홋카이도는 겨울이 제맛이라고 하지만, 추위를 타는 아내를 위해서 가을 단풍을 택했다. 멀지도 않은, 출장으로 익숙한 일본 여행은 제주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삿포로행 비행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치토세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푸른 가을 하늘에서 새처럼 활주로에 안착했다.

  공항 내부로 들어가면서 벽면에 많은 광고판이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건조한 가을 날씨 탓인지, 즐겨 마시던 맥주가 생각나서인지 몰라도 ‘삿포로’ 맥주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이 그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었다. 삿포로 맥주가 맛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홋카이도 천연의 물로 제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약속한 일본 여행은 종합 정밀검진을 받으면서 시작이 되었다. 건강검진 예약을 하면서 걱정이 앞섰다. 혹시 생각지도 못한 병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에 검진 전날 잠을 설쳤다. 검사 결과를 상담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기우가 현실이 될까 검진받던 날보다 더욱 긴장되었다. 여의사는 폐 CT 영상을 보여주고, 급하게 호흡기 내과 전문의와 예약을 잡아 주었다.     

  내과 전문의는 폐 CT 영상을 보면서 하얗게 퍼져 있는 부위를 가리키며 범위가 크다고 말하면서, 상당히 진전된 폐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정밀 검사를 위해서 당장 입원 준비를 하라고 했다. 가장 초기에 정확하게 암을 찾아내는 최첨단 검사방법인 펫시티(PET-CT)를 먼저 찍고, 병실이 비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의사의 확정적이지 않은 소견이었지만, 폐암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진료실을 나서면서 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얼마를 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감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눈을 뜨니 밖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회사 출근하면서 입원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 둔 가방을 항상 들고 다녔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병원에서는 아직 병실이 없다는 연락만 왔다. 다음날, 의사와 면담부터 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진료실은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의사의 표정은 약간 겸연쩍어 보였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펫시티 영상을 보여주면서 지난번 건강검진 영상은 폐렴으로 인한 것이었고, 지금 영상에서는 아무런 증상 없이 깨끗하다고 했다. 그런 해프닝이 있고 난 뒤, 다니던 직장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때 아내에게 가고 싶어 하던 일본 여행을 약속했다.     

  일본에 가면 꼭 가고 싶은 곳이 두 군데였다. 화산과 온천이 있는 료칸(여관)이었다. 인생의 가장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런 장소였기 때문이다. 화산의 활동성과 온천의 평온함이 그것이다. 그곳이 이번 여행의 가을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첫 목적지로 쇼와신잔(昭和新山)을 선택했다. 한국에도 백두산을 제외하면, 한라산과 울릉도에 볼 수 있지만, 휴화산이거나 사화산이다. 일본은 대부분 지금도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활화산이다. 쇼와신잔은 가장 최근인 쇼와시대에 새로 생긴 화산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화산 형성 당시 지진이 발생했고, 1943년 화산폭발 이후 약 2년 동안의 화산활동으로 지반이 올라와 만들어진 해발 402m의 기생화산으로 일본의 천연기념물이다. 

  원래 보리밭이었던 이곳은 현재까지 화산활동이 진행되는 활화산으로 식물은 자라지 못하는 붉은색의 산이었다. 지표 온도가 300도를 넘나드는 쇼와신잔 정상에는 신비로운 수증기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높지 않아 올라가 보려 했지만, 등반 불가라는 안내판을 보고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마치고 삿포로 교외에 있는 조잔케이온천(定山溪温泉)으로 갔다. 이곳은 20여 개의 료칸이 있는 홋카이도 최대의 온천 도시이자, 시코쓰토야 국립공원 안에 있는 홋카이도 최고의 명소이기도 하다. 가을철 나뭇잎들이 일본 중부 및 남부보다 몇 주 먼저 단풍이 드는 이곳은 울창한 원시림에 둘러싸인 계곡에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몹시 아늑하고 고요했다. 온천 전체가 풍광이 화려해서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시간이 마냥 느리게 흘러가길 바라게 된다. 일본 여행의 끝의 백미는 온천이다. 여행의 피로를 풀고, 온천 후 정갈한 일본 음식과 함께 삿포로 맥주를 마시면 ‘이것이 인생이다.’(C'est la vie)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화산, 온천, 호수의 대자연을 여행하면서, 두 번째 일본 여행이 기대되었다. 신치토세 공항에 들어서면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홋카이도 여행에서 한국적인 냄새와 낯설지 음식 그리고 일본인의 친절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입국 때 봤던 삿포로 맥주 광고판이 보였다. 료칸에서 온천 후, 먹었던 한 모금의 맥주 맛이 생각나면서 입 안을 적셨다. 이번 일본 여행 선물은 양갱 대신 맥주를 사기로 했다. 비행기가 창공을 치솟으면서 홋카이도의 풍광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승무원에게 맥주를 달라고 했다. 아내와 ‘간빠이!!’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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