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의 자스민 청년

단편소설(월간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작)

by 김창수


카이로의 하루는 항상 더운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새벽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여느 날과는 달리 조금은 공기가 서늘해 있었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벽시계의 바늘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잠을 깨운 것은 사원 쪽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였다. 아직 여명이 남아 있는 새벽에 첫 기도가 시작되면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는 새벽마다 나의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이곳 카이로의 무슬림 신자는 매일 하루에 5번 예배를 올렸다.

“알라는 위대하다. 나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고 증언한다.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도인 것을 증언한다. 자, 예배에 와라. 자, 성공을 위해서 와라.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외에 신은 없다.”

7절로 된 ‘아잔’ 소리는 은은하게 읊조리는 독경(讀經) 소리처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 새벽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는 다른 날과 달리 내 마음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까닭은 어제저녁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카이로 람세스 광장의 ‘알파트’ 모스크의 진압 작전을 연기한다는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카이로의 새벽은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고요했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아잔’ 소리가 그쳤을 때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전화를 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면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지 시간을 모르고 한국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뜻밖으로 메기드였다.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 속에는 폭음 소리, 소란한 움직임,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 등등 잡음이 뒤섞여 있었다. 메기드는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 중인 듯 목소리가 희미하게 잡음을 타고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전화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메기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메기드! 메기드! 메기드!”

메기드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내 목소리는 그때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아잔’ 소리에 덮였다.

“아~앗!”

그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전화기 속에서 메기드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왜 그래? 메기드! 메기드! 내 말 안 들려요?"

나는 또다시 메기드를 정신없이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조용해졌다. 내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지면서 들고 있던 전화기가 카펫 위로 떨어지면서 뒹굴었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지금 메기드는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메기드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카이로에 온 것은 1년 전이었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봤던 카이로는 ‘캄신’으로 자욱하게 덮여 있었다. 사막 속의 도시인 카이로에서, 도시 속의 사막이 보였다. 카이로 시내로 들어왔을 때는 3월이면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인 ‘캄신’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물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정거리가 짧았다. 그런 ‘캄신’ 속에서 카이로는 얼마 전 중동 전역으로 불어 닥친 ‘자스민 혁명’의 물결을 타고 전 지역이 전쟁터와 같았다. 혁명의 꿈에 부풀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의 성공과 상관없이 오랜 군정에 지친 나머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 혁명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날지 알 수 없었지만 오래전 자신들을 착취했던 영국인들이 스핑크스 코의 일부를 잘라버린 것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처럼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카이로에 도착한 나는 외국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메다니’에 짐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가까운 한국식당으로 갔다.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 날은 중동의 안식일인 금요일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의 건너편 자리에는 이집트인처럼 생긴 젊은 남자가 한국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는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뭔지 모를 수심이 짙게 깃들어 있었다. 그 눈빛이 내 가슴속을 쓰윽 파고들었다. 동행했던 한국 직원은 줄곧 젊은 남자를 주시하고 있는 나를 보고 쓸데없이 저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날 나와 젊은 남자는 그렇게 헤어졌다.

며칠 후 나는 다시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한국식당이니 한국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식당 안에는 외국인들도 제법 되었다. 외국인이 한국 식당을 찾아오는 경우는 한국인의 초대해서 오거나 한국의 진한 양념 맛에 중독이 되어서 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식당 주인을 통해 며칠 전 이곳에서 보았던 젊은 남자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은 메기드, 카이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 한국 여행사에서 일하는 이집트인이라고 했다. 한국 여행사는 이집트에서 외국인들이 관광가이드를 할 수 없어서 현지에서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고 있었다. 이집트 정세가 이처럼 불안한데도 불구하고 한국 관광객들은 기독교 성지순례라는 명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카이로에 왔다.

나는 한국에서 온 손님과 함께 한국 식당을 갔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를 숙소로 데려다 줄 기사를 기다리며 식당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우연히 메기드를 또 만났다. 메기드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수인사를 했다. 나는 어색했지만 여러 번 눈인사를 나누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아는 체를 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메기드입니다."

메기드의 한국말은 유창했다.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어요?”

내가 웃으면서 물어봤다.

“한국 여행사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어서 자연스럽게 몇 마디 배웠습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배운 한국어인 것 같았으나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그렇게 메기드와 정식으로 말을 트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메기드에게 명함을 건넸다. 외국생활을 하다 보면 현지인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이집트인들은 더욱 그랬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시위로 인하여 나의 카이로 생활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장 군인, 경찰들이 거리를 삼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집 앞에 서 있는 장갑차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고, 곳곳에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서 있었다. 전날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야권 및 시민단체들이 모여 ‘무르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신헌법 선언문 발표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었다. 집회는 시위로 번졌다. ‘무르시’ 정권 출범 이후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였다. 수도 카이로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포트사이드 등 주요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 연일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불안은 가중되고 있었다.


나는 이집트에 대규모 발전소 공사를 수주하여 프로젝트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카이로 인근에 건설하고 있는 발전소는 이집트 정부에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심려를 기울이고 있었다. 발전소 경비를 위해서 많은 인원의 경찰들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반정부 시위의 확산으로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으로 차출되면서 치안문제가 발생하였다. 현장소장이 공사 작업이 중단되었다는 보고를 했다. 이미 준공단계에 있어야 할 공기(工期)가 벌써 6개월 이상 지연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 전력부장관 면담을 요청한 상태였다. 공기(工期)가 늘어지면 계약에 따라 그 기간만큼 배상을 해야 했다. 정부 발주 프로젝트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장관 면담에서는 ‘불가항력 조항’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했으므로 골치가 아팠다. 현장소장이 시내에 있는 나의 사무실로 온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전력부장관 면담 자료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김 소장! 현장 분위기는 어때요? “

공기(工期) 연장 문제로 다소 짜증스러운 내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로 흘러내렸다.

“현지 폭력배들이 권총을 소지하고 현장 근로자들을 위협하면서 스트라이크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장 소장은 현지 폭력배들과 경찰들이 내락(內諾)이 되어 있어서 속수무책 상황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현장 사진을 찍고 가능한 많은 증거를 채집(採集)하세요.”

나는 대책 협의를 끝내고 사무실을 떠나는 현장소장에게 안전에 유의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꽤 늦어서야 한국식당으로 갔다. 그날도 손님들은 많았다. 그들은 이미 술에 취한 듯 얼굴을 불그스레 붉히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 속에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메기드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메기드도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가던 메기드가 관광객들을 근처 숙소로 바래다주고 시간이 되면 오겠으니 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메기드가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어 그러는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흔쾌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오래 기다렸죠?”

잠시 후 메기드가 친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얼굴로 식당으로 다시 들어왔다.

“이슬람교에서는 술 마시는 것을 금기시하던데 술을 마셔도 괜찮아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는 곱틱’(Coptic)입니다.”

메기드가 앞니를 드러내면서 씩 웃으며 말했다.

‘곱틱’은 이집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집트 인구의 10퍼센트가 ‘곱틱’이라고 했다. 어느 나라나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헌법에 명시가 되어있지만 실제로 대세를 이루는 종교 집단이 그 나라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집트는 역대 대통령들이 ‘곱틱’이어서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이 10퍼센트 ‘곱틱’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 왔다고 말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지만 이집트는 그랬다.

“이집트에서 이슬람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관대한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문과 다릅니다. 이슬람의 코란에는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은 만 명의 죽음과 무게가 같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코 잔혹한 종교가 아닙니다. 이슬람은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를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거였죠.”

메기드는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종교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이집트에서 종교적인 갈등이 없었던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시대뿐이었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 사람들이었지만 종교적 교리로 인해 삶이 파괴되고 있는 걸 보면서 메기드는 이집트의 문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비판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195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왕정이 끝났습니다. 1956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3명의 대통령이 모두 군인이었습니다. ‘무바락’ 대통령이 독재정권의 타깃이 되었던 이유는 극심한 부정부패와 민생 압제 정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스민 혁명’은 튀니지에서 시작하여 중동지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이웃 국가인 이집트의 ‘무바락’ 정권까지 퇴진시켰다. 2년간의 무정부 상태에서 새로 들어선 것이 이슬람교도인 ‘무르시’ 정권이었다. 55년 만에 민간정부가 그것도 이슬람 정부가 들어서면서 ‘무르시’ 대통령은 이슬람식의 신헌법을 추진하였다. 그런 과거로의 회귀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동안 미국을 배경으로 국부(國府)를 가지고 있는 ‘곱틱’이었다. ‘무르시’ 대통령은 결국 군부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메기드가 주장하는 이집트의 비극은 종교적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군사정권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무기력이라고 말했다. 한 명의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진 여러 마리의 사자들은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듯이 그렇다고 말했다. 메기드는 이집트의 그런 현실을 한탄하면서 술을 마셨다. 메기드의 괴로움은 자신이 이집트의 젊은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었다. 나도 그랬었다. 나는 메기드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의 대학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도서관에서 다음 날 수업시간에 제출할 리포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료를 찾아 책상에서 리포트를 쓰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한 남학생이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내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남학생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쿵쿵쿵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도서관 안으로 들이닥쳤다.

“저놈이다! 잡아라!”

한 무리의 경찰과 사복 차림의 사내들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앞자리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남학생을 찾아내어 무참하게 두들겨 패더니 끌고 나갔다. 남학생의 눈동자는 풀려있었고, 머리에서는 빨간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서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가득했던 도서관 한구석에서 누구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픔이나 두려움의 울음이 아닌 울분을 가누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눈물이었다.

“나쁜 놈들! 인간쓰레기 같은 놈들!”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몇몇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사람들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도서관을 나왔을 때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도서관 앞 군데군데 최루탄의 잔재들이 쌓여 있었다. 한국도 이집트처럼 꽤 오랜 세월을 군사 정권 속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많은 젊은이들이 숨을 죽이고 절대 권력에 굴종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이들이 일어났다. 독재타도를 위해 목숨을 건 항쟁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한줄기의 빛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에 또 절망을 해야 했다. 나는 대학 시절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


내가 메기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한국 식당이었다. 메기드가 한국 관광객을 이끌고 식사를 하러 왔을 때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그날 밤늦게 메기드와 헤어진 나는 한동안 한국 식당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이집트의 불행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는 메기드의 모습이 항상 눈앞에 아른거렸다. 힘든 현실을 살아내는 이국의 한 청년에 대한 연민(憐憫)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30년 전에 내가 했던 고민을 지금 메기드가 하고 있다는 것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메기드를 더 이상 이국(異國)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메기드와 연락이 단절된 후 혹시 한국식당에 가면 볼 수 있을까 해서 나도 모르게 찾아가곤 했다. 금방이라도 메기드가 미소를 띠며 한국 관광객들과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았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카이로의 생활은 날로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5월의 꽃향기마저도 모래 바람과 함께였다. 멀리 보이는 나일 강에는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날도 비상사태를 선언한 군부세력들은 ‘무르시’를 지지했던 세력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카이로 시내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에는 연일 집회가 열렸다. 무슬림들은 알라신의 위대함을 방패로 맞서며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인 오주(五柱)를 실천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알라에게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매일 달라지는 예배 시각에 하루에 다섯 번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에 메카를 향해서 예배를 드렸다. 재물을 희사(喜捨)했으며, 매년 라마단 기간에 단식을 하였다. 이슬람 성지를 순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모든 일은 알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군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대항해서 순교함으로써 위대한 알라에게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알라에 대한 믿음으로 이집트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군부는 만만치 않았다. 체제의 전복을 원치 않는 군부는 알라의 위대함을 외치는 무슬림들을 향해 밤마다 총을 겨누었다. 알라를 부르는 소리가 커질수록 총소리도 커졌다.


그런 정세 속에서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나일강의 물줄기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시위도 조금씩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서는 여전히 알라의 위대함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폭탄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비밀경찰들은 폭탄 테러한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자신들이 알라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테러로 불안한 시민들에게 정부는 소수의 폭력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홍보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말에 솔깃하면서 이제는 자신들이 믿어야 하는 것은 강력한 정부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날은 군부가 더 이상의 폭력은 용납을 할 수 없다면서 계엄 선포를 했던 날이었다.

오랫동안 메기드’를 만나지 못한 나는 그날도 한국 식당에 있었다. 내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한 사람은 메기드였다. 그동안 너무 많이 수척해져 버려서 식당으로 들어오는 메기드를 보고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메기드는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패잔병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나는 자리에 앉은 메기드의 어깨를 감싸주며 말했다. 메기드의 눈빛은 내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형편없이 지쳐있고 무력해져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텐트를 치고 한 달 동안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텐트를 부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갔습니다.”

메기드는 농성을 하는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어제저녁에 계엄선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라는 전달을 받았지만 강경파들은 끝까지 이곳을 사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 오기 직전에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메기드는 낮은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그는 농성 장소가 아수라장이 되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개처럼 끌려가면서도 알라의 위대함을 외쳐댔다고도 했다. 자신은 ‘곱틱’이지만 이집트는 종교를 초월해서 군사정권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50여 년간 이어온 군부독재의 종식을 위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무르시’ 대통령이 정당성을 가지고 민간 정권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메기드의 말을 들으면서 또다시 30여 년 전의 일들을 반추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캠퍼스 생활이었다. 교정에는 내가 상상했던 낭만이나 자유는 없었다. 학생들은 매일 같이 시위를 하면서 정문 밖을 돌파하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경찰봉을 들고 서 있는 방패들에 의해서 번번이 실패만 하고 있었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만이 우리의 코를 중독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문 안에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던 학생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정문 안의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들이 되어 있었다. 경찰들은 담을 넘어서 골목으로 우회하여 큰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잽싸게 잡아서 닭장차에 실었다. 사복경찰들은 교내에서 서클 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선배들은 잠정적으로 활동을 해체하고 은둔하였다. 그 무렵 나는 영장이 나왔다. 2년간 나와 같이 서클 활동을 하면서 형제처럼 지내온 응철이는 군대에 입대하는 나를 배웅했다. 군에서 나는 연일 계속되는 폭동진압 훈련으로 지쳐있었고, 폭도들에 대한 분노가 가슴을 폭발시키기 직전이었다. 응철이는 폭동진압에 지친 우리가 폭도라고 부르는 시위대의 앞 대열에 있었다고 했다. 시위대는 맹수가 되어 성난 목소리로 자유를 부르짖었다. 진압군은 포수가 되어 시위대를 무차별하게 사냥을 했다. 그렇게 포획한 먹잇감의 일부가 응철이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응철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메기드는 식당을 떠났다. 그날 이후 메기드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빠져나온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메기드는 이집트의 불행을 막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곱틱’이라도 알라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무슬림들이 알라가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집트인들이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종교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메기드는 그때 카이로 람세스 광장의 ‘알파트’ 모스크에는 수천 명이 모여서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교의 모스크는 단지 공동으로 기도 의식을 하는 자유 공간일 뿐이었다. 신상(神像)이나 제단을 불허하고 신비한 장면, 종교적 의례도 없었다. 모스크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건축양식에 특별한 방식과 예식도 없었다. 건물 내부에는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끼블라’가 있을 뿐이었다. 교도들은 자리에 앉아 코란을 외면서 예배를 드렸다. 모스크는 내적인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장소로 신분계층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넓은 양탄자를 깐 공간은 그들과 알라와의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그런 지점이었다.

“지금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코란을 외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여기 분위기는 차분하고 사람들도 평화스러워 보여요. 밖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총격전에 대비해서 곳곳에 저격수들을 배치한 모습이 눈에 띄고 있어요. 결사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는 듯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전혀 동요가 없습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메기드의 목소리는 긴장하고 있었으나 침착했다.

지금 알라만이 조국 이집트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속에 메기드도 함께 있다고 했다.

“당신은 ‘곱틱’으로 이교도인데 그들이 당신의 진정성을 받아들일까요?”

‘곱틱’들은 의상이나 생김새로 구분이 되었다. 종교의식의 차이가 큰데 쉽게 종교 적동화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당신의 애국심은 얼마든지 나중에라도 증명할 수 있으니 그 자리를 빨리 빠져나오세요.”

나는 메기드를 재촉하며 말했다. 메기드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군부의 탄압에 대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설 수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는 듯했다. 내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그런 메기드가 자칫하면 군부의 스파이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메기드가 진심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다.

나는 메기드가 걱정이 되었다. 이집트의 문제가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알파트’ 모스크로 들어갔던 것일까? 이집트의 과거 정권이 ‘곱틱’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그는 무슬림과 함께 있었던 것일까?

지난 수십 년간 지구 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이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역사 속의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만 역사 속에서 그들의 희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치른 희생으로 후세들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메기드의 전화는 그렇게 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었다. 30여 년 전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이 메기드를 통해서 다시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응철이와 박 상병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시위가 극도로 다다랐을 때였다. 새벽 기상 음악에 점호를 위해서 연병장으로 뛰어나갔다. 고참들의 눈초리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긴장감이 돌았다. 점호를 취하면서 대열을 봤을 때 1개 소대가 없었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같이 식사를 하고 취침 점호 준비를 했었던 소대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소대는 폭동 진압 당시 제일 먼저 출동하는 화학소대였다. 그 소대의 대원들은 자기가 맡은 임무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다. 보안 검열에 걸리면 영창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보안교육을 철저히 했다. 화학소대가 부대로 복귀한 것은 그날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지친 모습으로 화학 장비를 정리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서 식당으로 왔다.

“박 상병! 무슨 일이 있었나?”

박 상병은 나와 입대 동기였다. 박 상병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나를 항상 웃겼다. 어릴 적 광주 무등산 철쭉, 진달래꽃을 보면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일, 양동시장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던 일, 광주도청에 근무하는 아가씨와 사귀다 결국 헤어진 일들을 한 편의 소설처럼 이야기해주었다.

“아무 일 없었어...”

말끝을 흐리는 박 상병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화학소대가 출동한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 비상이 풀렸다. 면회와 외박이 다시 재개되었다. 그동안 영내(營內)에서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 소문의 내용은 화학 소대가 그날 새벽 북악산에 있는 헬기장에서 헬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과 다음 날 광주 사태가 전남도청 진압작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박 상병이 왜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을 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박 상병은 제대할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는커녕 줄곧 나를 피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 상병은 제대하면 고향인 광주로 내려간다는 말을 했었다. 그것이 내가 박 상병을 본 마지막이었다.

메기드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메기드가 한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카이로 시내에 있는 사원에서 군인들의 진압작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던데 괜찮으냐?”

내 안부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에 다닐 때도 그러셨다. 시위대에 참가하지 말라고... 군대에 있을 때는 밖이 시끄러워 때 몸조심하라고... 그리고 지금 또다시 멀리 있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아들을 위해 같은 걱정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 여기는 안전해요. 문제가 있는 지역은 여기서 멀어서 괜찮아요.”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30년 전처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몸조심하라는 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내가 메기드에게 하고 싶은 말도 어머니의 말처럼 부디 몸조심하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메기드는 이집트의 군부독재 항거가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곱틱’이면서도 ‘알파트’ 모스크에서 그렇게 알라에게 영원히 가버렸다.

나와 메기드가 만난 기간은 짧았지만 그때 내가 그를 통해서 맡은 자스민 향기는 지금도 내 영혼 깊이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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