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의 추억

단편소설(문학의식 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작)

by 김창수

나는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 떠 있다. 비행기가 상공을 날고 있는 동안 나는 20여 년 전 러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를 회상한다. 지금도 그때처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출장이다. 출장은 항상 내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이번은 또 다른 설렘으로 다가온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모스크바에 갔던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이 떠오른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을 빠져나갔을 때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실감 나게 하던 이국의 풍경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하얀 피부색에 무표정한 얼굴로 늑대를 연상시키던 낯선 이국인들이며,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어로 방문 목적을 물어보던 입국 심사관, 범죄자를 취조하듯 싸늘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입국심사 분위기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내 눈앞에 스쳐 가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20여 년 전 내가 만났던 알라였다.


*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텔렉스가 요동을 하며 바쁘게 작동하고 있었다. 약어로 표기되는 텔렉스 카피가 데스크 위로 봇물 터진 둑에서 물이 새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로 보아서는 당장이라도 전투 병사를 투입되어야 할 만큼 긴박한 전운이 감도는 격전지를 연상케 했다.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요.”

본부장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은 이 긴박한 분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본부장의 목소리는 일상적인 업무를 지시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낮은 저음으로 빠르게 뱉어내는 어투로 보아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나는 곧바로 본부장 방으로 갔다.

“다음 주 러시아로 출장 갈 일이 있으니 준비를 해두게.”

본부장은 마땅히 있어야 할 출장 목적이나 출장 기간에 대한 설명도 없이 한 마디를 툭 내뱉고 그만이었다. 그건 본부장만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나와 본부장 사이에는 몇 초간 정적 같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침묵 상태에서 이 출장의 목적을 유추했다.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정부는 러시아와 수교를 맺기 위해서 경제협력 차관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러시아를 잠재적 시장으로 보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시장 확대를 위해서 그룹 차원에서 러시아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부장이 내게 러시아 출장을 명령한 것은 그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출장 목적과 기간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본부장만의 독특한 스타일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대화를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러시아 자동차 공장 인수 건으로 2주 후 회장님께서 현지로 출장할 예정이네. 그러니 자네가 미리 가서 불편함이 없도록 사전 준비를 해놓아야겠어.”

본부장의 말에 나는 어머니의 모습부터 떠올렸다. 어머니는 혼기가 지난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일에만 매달리는 일을 자나 깨나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도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달고 계시는 나의 결혼을 들먹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에게 나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다. 누이들은 벌써 시집을 가서 애들이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너는 여태 뭐하느냐면서 친손자가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그렇게 내게 비치었다. 하지만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내 조건은 아무나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 여자들은 대번에 난색을 표했다. 그런 몇 번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부터 하게 만들었다. 결혼의 목적이 자식을 낳기 위한 것만은 아닌데 어머니가 간절히 요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결혼을 당위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전제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손자를 낳아줄 여자를 데리고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출장 이야기를 꺼내면 장가가라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이제는 아주 멀리 도망가는구나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는 스스로 삐쳐 있을 일을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부장이 그런 나를 출장 보내기로 한 것은 러시아를 여러 번 다녀온 경험과 사장 비서로 있었던 내 직책을 감안한 후 내린 결정 같았다. 해외사업은 선배들이 ‘전투’라고 표현할 만큼 피아식별이 안 되는 곳이어서 진지를 구축하고 새로운 사업을 확보해야 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야전의 전투 경험과 특수부대 출신 ‘전사’의 경력이 있는 내가 이번 출장에는 적임자로 본 듯했다. 어쨌든 나는 이번 출장에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그날 나는 밤늦게 호텔에 도착했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조명 장식이 인상적이었던 로비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져서 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속에는 더러 매춘 행위를 위해 왔을 인터걸로 짐작되는 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그중 인터걸로 보이는 한 여자는 동양인인 내가 낯설지 않은 듯이 유혹의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출장을 떠나기 전 날 회사 선배들이 러시아에서 인터걸은 KGB와 연결되어 있으니 조심하라던 말을 떠올리면서 카페를 나왔다.

방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 유리창에는 모스크바 강이 비쳤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모스크바 강물 위에는 달빛이 어려 있었다. 모스크바 강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주변의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나트륨 가로등에서 퍼져 나오는 붉은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아름다웠다. 그 풍경은 고스란히 내가 서 있는 창문에 판화처럼 찍혔다. 나는 야경을 음미하면서 보드카를 마셨다. 러시아의 보드카는 차갑게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뜨겁게 온 몸을 달구었다.

내가 모스크바의 세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카잔으로 떠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러시아 국내선은 적재물과 승객이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우랄산맥을 넘어서 1시간가량을 지나서야 카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잔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거리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껍게 쌓은 벽돌 건물들, 열기가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듯 창마다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차단시킨 거리는 암흑에 가까웠다.

회사 현지 직원으로 모스크바에서 만난 스베틀라나는 내가 카잔 시내 중심에 있는 임시 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할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다시 연락을 취해왔다. 현지에서 통역을 도와줄 사람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바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을 때 스베틀라나 옆에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한 여성이 있었다.

“카잔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인 알라 씨입니다.” 앞으로 카잔에서 우리 사업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

스베틀라나가 여자를 내게 소개했다.

“즈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알라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호텔까지 찾아와 준 현지 통역가 알라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나이는 30대 중후반으로 짐작되었고, 단정한 외모와 이지적으로 보이는 표정이 첫눈에도 신뢰감이 느껴졌다. 육감적인 몸매는 또 다른 매력으로 내 마음을 끌었다. 그날 나와 알라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곧바로 헤어졌다.

숙소를 겸해 임시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호텔은 카잔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안은 잘 되어 있었으나 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총소리에 밤늦도록 나는 잠을 설쳐야 했다. 새벽에야 겨우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나는 아침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나의 잠을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전화를 받아보니 “깍 젤라?(안녕하세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어젯밤에 만났던 알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서야 어젯밤 헤어지기 직전 오전 9시에 알라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해냈다. 알라의 집은 내가 묵고 있는 이 호텔에서 10여분 떨어져 있는 주택가에 있다고 말했다. 출발 전 내게 미리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허겁 지접 샤워를 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알라는 9시 정각이 되자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젯밤 잠자리가 불편했나 봐요?”

‘알라’는 내가 잠을 설친 것을 세심하게 잡아냈다.

“오늘은 본사 일행의 출장 계획 협의를 위해서 정부 관계자 면담을 최대한 빨리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베틀라나는 알라에게 오늘 일정을 말했다. 나는 카잔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베틀라나로부터 들은 알라의 신상을 상기하고 있었다. 알라의 남편은 현지 변호사로 최근 옐친 대통령에 대한 과격한 발언을 했던 카잔 마피아 두목의 변호를 맡고 있다고 했다. 스베틀라나는 알라가 현지 정부 관료들과 인맥을 맺고 있지만 남편이 맡고 있는 카잔 마피아의 변호로 우리의 사업에 영향을 받을지 모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었다.

스베틀라나는 그날 오후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이번 프로젝트 건으로 한국 본사의 업무지원을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베틀라나에게는 다음 주면 카잔에 도착하는 본사 출장 팀을 안내하여야 할 일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알라와 둘이서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오전,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 정부 대외협력국장과 미팅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나는 알라와 함께 타타르스탄의 정부조직에 대한 파악과 대외협력국장과 협의해야 할 어젠다를 하나씩 정리하였다. 그런 다음 대외협력 사무실로 갔다. 외국의 영화에서 본 듯한 체격이 건강하고 멋진 남자가 나와 알라를 맞아주었다. 그 남자는 적당히 기른 수염과 살아 있는 눈빛으로 나를 단번에 압도해버렸다. 그 사람이 국장으로 있는 대외협력국은 타타르스탄 정부의 창구 역할을 하는 곳으로 정부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고 있었다. 또한 정부 관련 인사를 접촉하기 위한 공식 채널로써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주요 접촉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타타르스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매력적인 대외협력국장이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은 알렉세이였다.

“이번 한국기업의 방문과 현지 투자 제안에 대해서 타타르스탄 정부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습니다.”

나와 알렉세이가 대화를 주고받으면 옆에서 알라가 통역을 해주었다. 영국식 발음의 정통 영어를 하는 알라의 통역이 알렉세이에게도 잘 전달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알렉세이를 상대로 회사 소개와 방문 목적에 대해서 설명했다. 알렉세이는 본사 회장 일행의 방문에 대해서 이번 주까지 기본적인 일정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런 알렉세이가 이번 자동차 공장 인수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물급 인물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알라의 안내로 카잔대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카잔 대학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레닌’과 ‘톨스토이’가 공부했던 대학이라고 알라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학 캠퍼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200년이 넘은 중세의 건물들은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 지붕 아래로 해가 떨어졌을 때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스산해 보였다.

나는 알라와 식당으로 갔다. 러시아의 식당은 서유럽에 비해서 약간 목가적인 분위기였다. 추위를 막기 위한 듯 건물 벽은 상당히 두꺼웠다. 실내장식은 슬라브 인들에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썰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촉수 낮은 조명이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웨이터가 메뉴 판을 놓고 갔는데 내가 아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알라가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왔다. 솔직히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호텔에서 끊어 먹다가 냄새가 난다는 항의를 받았을 만큼 러시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나는 알라에게 한국음식이 그리워진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알라가 웨이터를 부르더니 뭔가를 설명했다.

“샤실릭과 솔랸카를 주문했는데 어느 정도 입에 맞을 겁니다.”

알라는 샤실릭은 양고기를 기다린 쇠꼬챙이에 꽂아서 숯불에 구운 요리이고, 솔랸카는 토마토소스와 고기로 끊인 수프라고 말했다. 음식이 왔다. 먹어본 음식이 알라의 말대로 내 입맛에 어느 정도 맞았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알라에게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였다고 했다. 이곳의 판사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10살 된 외동딸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알라도 나의 가족 사항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어머니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내 표정에 알라는 괜한 말을 물었다는 듯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알렉세이를 만나고 알라와 함께 지냈던 불과 며칠 사이 계절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카잔의 봄은 볼가 강에 얼음이 녹으면서 시작된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며칠 동안 장대 같은 비가 내리면서 볼가 강에 두껍게 얼어있던 얼음을 녹아버린 것이다. 얼었던 강물의 속살이 드러나고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수증기가 발생했다. 그 열이 나무와 풀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푸른 싹들이 돋아났다.

카잔에서 나의 생활은 일이 아니면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그동안 나는 본사 회장 일행을 맞이한 일과 타타르스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자동차 공장 인수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나는 그 공을 알라 같은 좋은 파트너를 만난 덕분으로 돌렸다. 알라는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도 나에 대해 신경을 썼다. 어느 때는 내 마음을 헤아리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알라가 좋았다.

며칠 후 저녁, 나는 알렉세이와 식사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통역을 맡은 알라도 당연히 동행했다. 알렉세이는 나에게 얼마 전 모스크바 중앙정부 부총리가 수상에게 전화를 했었다는 말을 전했다. 수상은 모스크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인물이었다. 러시아 자치공화국의 수상은 실제로 중아정부에서 임명하여 그 자치공화국을 통치하는 실세였다. 알렉세이는 내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자동차 공장 인수 건에 대한 지침을 하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정부의 지침이 곧 이번 사업의 결정사항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치상황은 경제상황과도 맞물려가는 중이었다. 어려워지는 국내 경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화폐 개혁까지 하면서도 뒤숭숭한 민심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옐친 대통령은 극단적인 경제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강자가 정의로 포장되기 마련이었다. 약자는 그런 강자를 규탄하며 정의를 부르짖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강자의 세계에서는 약자의 규탄을 저지하기 위해 더욱 냉정해지고 더욱 잔인해졌다. 그것은 필요악적인 생존의 싸움이었다. 한때는 강자였던 러시아도 이제는 약자의 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미국 측 회사에 자동차 공장 인수권을 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며칠 사이 자동차 공장 인수 사업은 불길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본사에 보고했다. 나는 본사가 러시아 중앙정부와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 간의 헤게모니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애써 진전시켜놓은 일들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로 알렉세이와 헤어졌다.


러시아의 5월은 한국의 5월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울창한 숲에 하얀 눈꽃이 만발했던 풍경을 지우고 초록물감을 채색하고 있었다. 나와 알라 사이에도 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타국에 혼자 나와 있는 나의 외로움을 토닥거리는 알라의 마음에 나는 필요 이상 유혹당하고 있었다. 폭풍처럼 몰아쳤던 일들이 해결되고 마음의 여우가 생기면서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볼가 강 뱃놀이 같이 갈까요?”

무료한 주말을 혼자 보내는 나를 위해 알라는 그런 제안을 했다. 알라는 나에게 남편이 모스크바 출장 중이니 부담이 없다는 말도 했다.

“볼가 강의 뱃놀이가 상당히 기대가 되네요.”

나는 알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볼가 강은 강폭만 2킬로미터에 달해 바다처럼 도도한 모습으로 흐르고 있었다. 알라는 양고기 바비큐에 필요한 음식들을 준비했다. 배는 강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배 안의 작은 선실에는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배 앞머리에는 바비큐에 필요한 화로와 숯이 준비되어 있었다. 배가 움직이자 훈풍이 불어왔다. 주변의 작은 섬들은 떠나가는 배를 배웅하듯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강변을 타고 펼쳐져 있는 숲에서는 새소리도 들려왔다. 가끔씩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튀어 오르며 우리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알라가 멀리 보이는 교회를 가리켰다.

“저 건물이 타타르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가장 오래된 키예프에 있는 교회가 991년에 세워졌는데 그때로부터 약 300년 후에 세워진 교회죠. 저는 키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카잔으로 발령을 받아서 30여 년 전 어릴 적에 이곳에 와서 자랐고요.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낯설기도 했지만 키예프와는 다른 종교와 문화 차이로 힘들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다른 모습의 친구들이 자기끼리 어울리며 같이 놀아주지를 않았죠. 그래서 항상 외톨이가 되어서 지금도 가까운 친구들이 없어요. 외로움이 싹텄던 것이 그런 어린 시절부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늘 가족뿐이어서 가끔씩 같은 고향 사람들을 만나면 그제야 해방감을 느끼곤 했죠.”

유년시절을 외로움으로 힘들게 보냈다는 알라의 말에 나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알라는 외로움 따윈 상관 않는 강한 여성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여린 구석을 내보이자 새롭게 보였다. 알라는 뱃머리에서 신선하게 보이는 양고기를 벌겋게 타는 숯불에 구웠다. 알라는 보드카도 꺼냈다. 나와 알라는 술잔을 부딪쳐가면서 ‘다드나!(건배)’를 외쳤다. 잔을 비우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두 사람 사이를 유지하고 있던 긴장의 거리가 급격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려 드러난 알라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알라의 가슴은 점점 더 노출되었다. 그동안 내 몸속 깊숙이 잠자고 있던 애욕이 빗장을 풀고 강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녀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다. 알라가 나를 포옹했다. 알라의 가슴에 귀를 대자 폭포수가 아래로 떨어질 때처럼 격렬한 심장 뛰는 박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알라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면서 몸속 깊이 빠져 들어갔다.

“야 류불류 바스(사랑해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들고 어려웠던 말을 알라가 그 순간에 내뱉었다. 그동안 알라가 내게 보여줬던 도도함과 의연함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제한적인 언어, 다른 문화와 이념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한순간에 이렇게 하나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알라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취한 것이기를 바랐다. 알라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이 무너지는 것이기를 바랐다. 나락으로 빠져들기를 한참 만에 나와 알라는 서로 몸을 풀었다.

“누구에게 자신을 온통 내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알라는 말끝을 흐렸다.

“가족들과 무슨 문제가 있나요?”

“가족에게는 문제가 없죠.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생활은 내가 원하는 생활은 아니죠. 강요된 생활이었죠. 이념의 강요, 체제의 강요, 그런 억압이 내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죠.”

알라는 공무원으로 살아온 아버지와 냉정하리만큼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있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내게 그렇게 토로했다. 그런 남자들만 보다가 사상이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니 부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통제된 사회에서의 답답한 일상과 자신을 억압하는 이념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알라의 말을 나는 어는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라의 커다란 눈에서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알라와 볼가 강 뱃놀이 이후에도 러시아어를 배우면서 카잔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 그녀의 집으로 초대되어 남편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고 내가 있는 숙소로 그녀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알라와 발레와 문학을 토론하면서 러시아의 문화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알라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사이 나는 알라를 전보다 더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를 통해서 고독과 외로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는 알라에게 나는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알라만 원한다면 일시적 욕망이 아닌 영원한 사랑으로 남고 싶었다.

며칠 후 본사에서는 내가 우려했던 대로 그동안 핵심적으로 진행하려던 자동차 공장 인수사업이 러시아 중앙정부의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뀌면서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 대신 백화점 사업에 대해서는 러시아 전국망으로 확대하라는 지침이 내려지면서 러시아 국영백화점의 본사가 있는 고르키(니즈니노보그라드)로 출장을 다녀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고르키(니즈니노 보그 라드)를 향해 떠났다. 알라는 내게 전화를 했다.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런 알라에게 사랑을 느꼈다. 빨리 카잔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알라의 품에 안겨 그녀의 향기를 맡고 싶었다. 하지만 고르키 출장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백화점 매장을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고르키 출장은 일주일 꼬박 채우고 나서야 마무리를 지울 수 있었다. 나는 고르키에서 보낸 일주일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고르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본사에 출장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알라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고르키는 어땠어요?”

나는 카잔에서 본 볼가 강과 고르키에서 본 볼가 강이 달랐다는 말을 했다. 고르키는 볼가 강 중류에 위치한 도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최대의 군수시설이 있는 곳이어서 러시아 사람들도 들어갈 수 없는 통제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의 순수혈통인 엘리트만 살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또 구름 위에 떠 있는 도시처럼, 꿈속에서 볼 수 있고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묵었던 호텔은 오래된 성처럼 웅장했어요. 방이 너무 넓어서 저녁에는 무서웠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당신을 그리워했습니다. 고르키는 하얀 색깔로 포장이 되어있는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의 모습도 그랬고 거리의 건물들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나의 말에 알라는 활짝 웃었다. 알라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을 하고 내 이야기에 취해 있었다. 알라가 말했다. 오래전부터 평범한 대화와 평범한 일상이 감동하는 생활을 꿈꿔왔다고....... 나는 그날 밤을 알라와 함께 보냈다.


며칠 후 나는 본사로부터 한 장의 전문을 받았다. 러시아 자동차 공장 인수사업은 중단하고, 현재 진행 중인 백화점 사업을 모스크바 사무소에 인수인계하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러시아에서 철수하라고 했다. 알라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가슴은 터질 것 같았고 몸에서는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나는 방 안에 있는 보드카를 정신없이 마셨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고 눈을 떠보니 창문에서는 벌써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았다. 알라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들려왔다.

“깍 젤라!(안녕)”

나는 그런 알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슴부터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알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고 쾌활했다.

“지금 당신에게 가려고요”

“..........”

“왜 말이 없죠?”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군요? 지금 당장 당신에게 가겠어요.”

알라는 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알라는 내가 생각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달려왔다. 숙소와 10분 남짓 한 거리에 있는 알라의 집이 그날은 더욱 짧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온 알라는 와락 내 가슴에 안기기부터 했다. 알라의 가슴은 여전히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스러운 미소만 보내는 알라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나는 알라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라를 침대에 눕혔다. 격정적인 순간에서 조차 알라가 받을 상처를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라를 놓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이대로 정지되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 이대로 아주 잠들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불멸의 시간 속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의 괴로움을 알 리 없는 알리는 쾌락의 절정에서 몸을 떨었다.

알라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눈앞에 다가온 이별 때문에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알라는 그때서야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알라는 왜 우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러시아에 온 목적이 무엇이며, 머지않아 떠날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라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예정보다 빨리 찾아온 이별에 좀 많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이지 알라의 입에서 같이 가고 싶다고, 그러니 제발 데려가 달라고 그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당신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끝까지 가고 싶다는 그런 말은 하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알라의 곁을 떠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알라는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예기치 못했던 사랑과 갑작스러운 이별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군요.”

그 말 한마디를 하고는 알라는 한기가 든 사람처럼 전신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예정대로 카잔을 떠났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나는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처럼 카잔을 떠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륙을 시작한 비행기 안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


기내 방송 스피커에서는 비행기가 곧 착륙을 하겠으니 안전벨트를 매어 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는 곧 지상으로 착륙했다. 나는 20여 년 전보다는 눈에 익은 카잔 공항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 눈앞에는 20년 만에 다시 보는 카잔 거리가 펼쳐졌다. 거리에는 흰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전통 호밀로 만들어진 흑빵 파는 상점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도 눈은 이렇게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를 하얗게 덮어버린 눈길 저 끝 어디에선가 알라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알라를 향해 손을 흔들다 말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분명히 내 눈앞에 있던 알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라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알라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알라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20여 년 전처럼 흑빵을 사려고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사람들만 내 눈앞에 있었다. 그때 한 상점에서 “나, 당신을 사랑하였소.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 기억되고 있다오.......”

카잔에서 배운 러시아 민요가 흘러나왔다. 나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눈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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