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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

2023.11.20. 월

by 고주

주말은 집에서 푹 쉬었다.

자유학년제 주제선택반 수업이 머리를 무겁게 해서다.

자료를 뒤지고 고르고 저장하기를 반복했다.

좀 편한 마음으로 주변 공원을 오르는데,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확 다가와 마음에 담아놓았다.



<가을 맛>


간편한 복장을 한

여인이

붉은 화살나무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파랗게 날 선 소나무잎을

똑 따

이를 쑤신다

떨이로 나온 가을을

맛나게 드셨나 보다



후문 앞이 장사진이다.

2번을 쓴 피켓 든 여학생들이 두 줄로 쭉 늘어서고, 그 사이를

자전거를 끌고 가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하이 파이브 환호성을 지르며 등교한다.

남학생들에게는 e스포츠 대회를 개최합니다.

여학생들에게는 화장실에 여성용품을 비치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점을 운영하겠습니다.

노후 운동기구를 교체하겠습니다.

자유복 입는 날을 늘리겠습니다.

프리마켓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공약사항을 상대에 따라 적절하게 외쳐대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추울수록 더 위로 올라가는 치마의 길이.

반바지라도 딸딸 말아 더 위로 위로.

대한민국은 여인 천국.

맨 뒤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머슴 같은 몇 놈.

1번과 3번은 어디 갔을까?

첫날이라 도와준다는 아이들이 깜박했나 보다.

선거라, 잘해야 할 텐데.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놓고 끙끙 앓고 있느니, 아들이 더 공부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36년 학생들과 살았는데, 고3보다 중1이 훨씬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식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려면 여러분들이 여러 단계를 더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은 구의 겉넓이와 뿔의 부피에 대해 제일 이해하기 쉬운 실험 몇 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잘 보아주세요.”

내 호소가 간절했는지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구의 겉넓이는 원 넓이의 4배, 뿔의 부피는 기둥의 삼분의 일 이라는 것을 적분이 아닌 모래나 물을 부어 직관으로 알아야 하는 답답함.

내가 공부했을 때는 그것도 없이 무작정 외웠던 것 같은데.

유튜브에 자료들은 넘쳐난다.

이렇게 공부하기 편한 세상에 왜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늘어날까?

개념에 딱 맞는 자료를 찾는 일은 노고가 따르는 법.

2,300년 전 아르키메데스는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했을까?

나름 오늘 수업은 만족도가 높다.

주제선택반 수업은 어수선하게 무한대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재미있는 퀴즈를 푼다.

눈을 반짝이며 문제를 풀고, 나와서 설명하는 똘똘한 아이 둘.

뒷걸음질 치다 쥐 밟는 몇.

무엇을 해도 관심 없는 십여 명.

다음 주는 수행평가 전날이라 시험공부를 하고, 그다음은 미지수에 대한 영상을 봐야 한다.

뚝심 있게 밀고 나가자.

6교시를 마치고 청소 감독을 한다.

현관 앞이라 은근히 신경 쓰인다.

감독 선생님이 뒷짐 지고 매번 서 있으니 청소하는 아이들도 열심이다.

“선생님이 제 롤 모델입니다.”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던 호가 고양이가 발목을 빙빙 돌 듯 또 등을 내민다.

1반이라 수업도 듣지 않고, 주제선택반에도 없어 궁금했는데, 잘 됐다.

어깨를 감싸고 물었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아느냐고.

친구들이 수학을 재미있게 잘 가르쳐주신다고 했단다.

자신은 수학자가 되고 싶단다.

언제부터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수학을 못 한다고 친구들에게 많이 놀림을 받았다.

이를 앙당 물고 죽어라 공부했다.

이제는 제법 수학을 잘한다.

수학자는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나는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니 방향은 좀 다르다.

원리와 개념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와 한계를 넘어서려면 끈기와 집념이 있어야 한다.

선생님이 영광이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

어째 이 녀석은 자주 볼 것 같다.

고목나무에 꽃 피네.

퇴직하고 이런 대접을 받다니.

감사한 일이다.

하루 새벽밥 먹고 나온 보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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