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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필을 들고 1
11화
내 그림
2023.11.15. 수
by
고주
Nov 18. 2023
다른 도시로 출근하면서도 2등은 싫은 나.
어둠과 함께 들어선 교정.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급식실뿐.
밥 하는 엄마가 제일 먼저 일어나셨듯이.
얻어먹는 주제에
감 나와라, 배 나와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지.
어디서 감히.
음악을 틀어놓고 국민체조를 하는 조리사님들.
<내가 그리는 그림>
지하로 내려가서
방해받지 않는 전철로 열심히 달려
지상의 정해진 곳으로 가
주어진 일 빈틈없이 땀 내서 마무리하고
다시 지하로 휩쓸려
지친 머리 누일 집으로
심장을 나선 피가 온몸을 돌아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듯이
서두르지 않고
뒷짐 지고 나들이하듯 하지 않고
황소걸음으로 또박또박
하루에 진하게 색칠한다
내가 그리는
나만 그릴 수 있는
내 삶의 그림
안도현의 ‘기차’라는 시에 떠 있는 문장들
단 한 번도 탈선해보지 못했으므로 기차는 저렇게
서서 우는 것이다
철길이란,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 자국으로 꿰매놓은 것.
기차는 검은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기어이
철길에 아랫배를 바짝 대고 녹물을 울컥, 쏟아낸다.
“선생님이 8반 수업하셨어요?”
“예, 무슨 일 있어요?”
“와! 원이 정말 동그랗던데요. 다른 도형도 사진 같아요.”
셋이 쓰는 교육정보실.
앞자리 영어 선생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36년은 그려보아야 저 정도 됩니다”
이런 제주를 썩였으면 어쩔 뻔했나.
힘닿는 때까지 잘 써먹어야지.
5반 아이들이 버겁다는 부장님.
실실 웃으면서 말을 따먹는데 머리 뚜껑이 열린다나.
나에게만 얌전한 양이될 일은 없지.
혁이는 시종일관 수와 이야기다.
몇 차례 눈치를 주었건만 접수하지 않는다.
수행평가일이 가까워져 진도 나가느라 온 신경을 쓰며 달리는데, 자꾸 브레이크를 밟게 한다.
주변의 조무래기들도 죽음의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황야를 달리는 무법자들처럼.
표정을 바꾼다.
한참을 말없이 쳐다본다.
열심히 따라오던 착한 아이들은 속으로 고소하다는 표정이다.
마지막이라는 최후의 통첩을 날리는데,
혁
이는 뒷자리의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고자질이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부족하다고 해야 할지.
내 파르르 떠는 눈꺼풀을 보았을까.
고개를 묻고 자는 척을 한다.
그래, 차라리 자라.
수업을 마치고, 축구를 잘하는 검둥이
수
를 부른다.
어깨를 감싸고 운동을 잘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잘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수업에 조금만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다.
믿어도 되겠느냐고 눈을 맞춘다.
끄떡이는 고개에서 진한 남자로서의 의리라고나 할까, 뜨거운 기운이 확 밀려온다.
문제는
혁이인데.
고놈은 쉽지 않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말귀를 알아들을 준비가 덜 되어있은 것 같단 말이야.
정답이 없는 교육의 험한 길이라.
수능시험으로 하루 반을 통으로 쉰다.
코로나로 못 나온 선생님 보강까지 세 시간을 연속으로 달렸다.
목이 칼칼하다.
해가 훤한 시간에 학교 밖을 걸어본 지가 얼마만 인가?
어딘가 기웃거리다 들어가고 싶다.
남자는 죽어야 속이 드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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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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