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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화
북방의 겨울
2023.11.13. 월
by
고주
Nov 18. 2023
귀마개를 하고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래도 춥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와
처음으로 겪는 북방의 겨울
맵다
사람으로부터 뜨거운 맛은
보지 말아야 할 텐데
한 발 떼고 한 발 딛고
조심 또 조심 서울살이
네 계절은 지나 봐야 안다고 했겠다
8시 20분부터 교문 지도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여학생도 제법 많다.
대부분 체육복에 두꺼운 패딩을 입었는데, 짧은 반바지를 입고 들어서는
머슴아들과 까시나들.
입술이 퍼렇게 잉크를 물었다.
춥냐고 물으니 춥단다.
그러니까 뭐 하자는 것인지?
바람 불면 다시 길 위에서 트위스트를 칠 낙엽을 아침마다 쓰시는 아저씨.
저녁 경비만 서시면 되는데 청소까지 덤으로 하시네.
선생님들은 8시 30분까지 출근.
아이들은 8시 50분까지 입실.
적어도 아이들보다 늦게 출근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약속.
이것이 돈보스코의 임장지도다.
살레시오 교문에서 보냈던 10년.
그냥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정도로만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내 꿈.
새삼스럽게 먼 타향에서 다시 꾸고 있다.
다면체와 회전체의 겉넓이를 구하는 수업.
삼각함수의 넓이는 왜 밑변과 높이를 곱한 것에 나누기 2 해야 되는지를 따지는 사과 소녀.
사다리꼴, 원의 넓이 줄줄이 멱살을 잡는다.
내접하는 삼각형과 외접하는 삼각형 사이에 원이 있으니 계속 다각형이 변의 수를 늘려가면 오차가 줄어들어 원의 면적이 된다고 해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며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단다.
결국 극한의 개념을 슬쩍 꺼냈다가, 미분도 적분도 펼쳤다가 생쇼를 한다.
밑변을 a, 높이를 h로 놓고 식을 쓰니 영어만 수두룩해서, 지금 수학을 하는 것이냐고 삿대질까지 한다.
좋은 지적이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고 격려를 하지만 통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학교 선생님은 초등학교 수업을 해 봐야 한다.
그래야 개념의 발전단계를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선생님은 중학교를 거쳐야 한다는 내 생각.
다 끝내놓고 알게 되는 사실.
어디서부터 밟고 올라가야 하나 심란한 때, 제자는 볼그레한 흑산 홍어에 낮술을 하고 있다며 사진을 올렸다.
침 넘어가는 급한 소리.
수능일 복무는 41조 연수로 하라는 메시지.
나이스를 켜고 혼자서 끙끙 앓는다.
다 해주었던 그때가 그립다.
속으로 들 욕했겠다.
더듬더라도 내 힘으로 해결해야지.
시간이 죽는다.
라틴방진, 마방진, 숫자 파이에 대한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주제 선택 두 시간을 채운다.
노트북을 들고 들어가 다양한 동영상을 함께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초보 선생님의 좌충우돌 적응기라고나 할까?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추운 겨울 만주 봉천에서 독립운동하는 기분으로 치열하게 살아야지.
결국 겨울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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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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