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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첫눈
2023.11.15. 금
by
고주
Nov 18. 2023
깨끗한 도로
파란 비닐봉지에 가득 담긴 낙엽들
가을을 서둘러 보내는 빗자루 소리
더 버티고 싶은 나무 위의 남은 나뭇잎
차가워진 공기와
세차게 내리치는 바람이
겨울과 함께 오고 있다
쿵쿵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하루 쉬고 나왔는데
또 반나절 만에 집으로 가란다.
매일 나오는 시간표에 오후가 없다.
물으니 매년 그렇다고
감독 선생님이 절반도 안 되는데
중학교라 시험장도 아닌데
선생님들도 좀 의아해하신다.
쉬는 것이 나쁘지 않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기기가 어렵다.
다행히 딱 한 시간만 떨려 나갔다.
부장님이라 부르는 같은 방을 쓰는 선생님들.
고향이 광주라는 영어 선생님, 어느 동네 어느 학교까지는 묻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 적절하게 익어야 맛이 나는 김장 김치처럼 기다려야 한다.
시댁이 전주라는 자매님 부장님, 사춘기 딸과 목포 여행을 하신다기에 영란횟집 민어회를 소개했는데, 너무 맛있게 먹고 왔단다.
아마 내가 해야 하는 업무를 몰래 하고 계실 것이다.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편치 않다.
어느 시점에 배워야 하는데, 그 시기를 잡기가 너무 어렵다.
축구 시합을 나가는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께 생활기록부를 요구한다.
여학생 10% 포함은 의무다.
그러니까 남학생과 여학생이 섞여 있는 팀으로 시합을 한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은 의무 비율이 너무 적다고 불만이다.
성평등의 취지로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대회란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보고 있다.
경기도가 항상 맨 앞자리에서 교육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용까지 단단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묵묵히 뜻에 따르는 선생님들의 노고 위에서 피는 꽃이다.
공간도형까지 수행평가 시험 범위다.
숨 크게 쉴 틈도 없이 달려야 진도를 마치고 보충 문제로 복습할 수 있다.
구의 겉면적은 중심이 지니도록 자른 단면, 원의 4배.
뿔의 부피는 기둥의 이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귤 모래 물로 시연한 동영상으로 대신한다.
직접 해 보는 것이 최고인데 그놈의 시간 타령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공식을 어찌 다 기억할꼬?
유튜브에 떠 있는 영상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틀어준다.
집중해서 자기가 하는 것처럼 보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창문밖에 옥수수 튀밥만 한 첫눈이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지 않은가?
첫눈 오는데 수업을 계속할 것이냐고 협박한다.
사과 소녀까지 배신하다니.
이놈들아 나도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에 흰머리 내려앉았다고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이, 그것도 첫눈이 가슴을 얼마나 나대게 하는지 결코 너희들보다 덜하지 않단다.
억지로 수업을 마쳤지만, 다음에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할 것 같다.
허탈하게 노트북을 챙기고 나오려는데, 순둥이
연
이 살짝 내 귀에 대고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한다.
개념만 설명하고 문제를 풀지 않았으니 지금은 좀 힘들겠지.
들을 때는 다 알겠지만 제 손으로 문제를 풀지 않으면 가물거리는 기억과 함께 맨날 맨땅에 헤딩이란다.
나만 바빠 달리는데, 아이들은 따라오기가 벅찬 모양이다.
특히 기초가 떨어지는 녀석들에게는 더하겠지.
복습 때 꼼꼼하게 챙겨야겠다.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일>
내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주하는 장면들을
나 혼자 생각만으로 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제까지 알고 있던 누구와 비슷하고
언젠가 겪었던 상황을 닮았다고
내 머릿속 책받침에 여러 가지 모양이 뚫려있는
구멍으로 맞추는 것이다
누구는 귀부분이 덮이고
어떤 것은 다른 것이 따라붙고
딱 들어맞는 사람, 장면이 어디 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이 공부해야
많은 구멍을 뚫을 수 있지
바르게 보고
깊게 알아가는 일은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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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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