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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듥겠다

2024.03.26. 화

by 고주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봄비가 슬금슬금 내리는 아침.

묘하게 다른 날보다 더 빠르게 학교 문을 넘는다.

구석에 박혀있는 청소기를 꺼내보니 먼지를 빨아들여야 하는 주둥이가 쫙 펴지지 않는다.

기계치인 내 재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빗자루를 들고 구석구석 먼지를 쓸어낸다.

허리가 묵직하니 잡아당긴다.

집에서 이렇게 열심이었다면 마누라가 업고 다닐 텐데.

밖에서 잘하는 사람, 영양가 없다는 말 꼭 틀린 것은 아니다.

우산을 쓰고 교장선생님과 함께 학생 맞이를 한다.

“수학 선생님이 인기가 있을 수 있나요?

제가 교장 되기 전에 있었던 학교에서 제 친구가 칠판 세 판을 쓰고 나면 종이 여지없이 쳤거든요.”

“수업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만 모든 문제를 선생님이 직접 풀어주는 것은 좀 오래된 방법입니다.

개념을 열심히 설명해 주고 문제 풀이는 스스로 하게 해야 합니다.

해답지들이 너무 잘 나와 있거든요.

풀이집에 없는 다양한 풀이를 소개하는 일, 질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받아주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전체를 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습니까?

모르면 연구해서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너무 앞서가는 대답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님들께 욕먹을 이야기인가?

이심전심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학생 맞이를 마친다.

‘시는 노래처럼, 소래섭’ 책을 가지고 나오니,

감사합니다. 등록하고 잘 읽히겠습니다.

라고 사서 선생님이 목련처럼 웃으신다.

등록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쑥스럽구먼.


늦은 7반 수업을 피 튀기게 하고 나오는데, 한 녀석이 따라 나온다.

다른 학교 선생님들보다 잘 알려주시는 것 같다며 인사를 한다.

다른 학교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전학을 왔다나.

조금의 내용을 친절하게 천천히 이해시키는 것.

중학교 1학년의 수준을 잘 생각하면서.

그리고 자주 반복해서 확인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사실 딱 한 명의 반응이니 들뜰 필요도 없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별것까지고 우쭐해지는 것을 보니 나도 중학교 1학년이 된 모양이다.


기초학력 진단평가 결과가 나왔나 보다.

“다 맞았는데, 수학에서 하나 틀렸다는 것이 말이 되냐?”

퍼렇게 질려서 거품을 무는 저 가시나.

기초학력 진단평가는 누가 더 많이 맞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을 찾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 목표이니 너무 열 내지 말라고 달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야 왜 모를까?

편한 시험은 없다.

운동장에 가득한 아이들.

대부분 농구를 하고 있다.

저번 학교에서는 축구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손으로 하는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개인적이고 도회적이고,

발로 하는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칠고 촌스럽다.

삼성과 현대의 이미지라고나 할까?

얌전하고 순한 이곳의 아이들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사실 남자다운 멋은 좀 없다.

자유학기제 동아리 활동. 사고력 보드게임반.

젊은 남선생님이 캐리어에 짐을 몽땅 싣고 왔다.

다빈치 코드 게임.

진지하다, 집중한다, 천정이 찢어질 만큼 긴장감이 감돈다.

환호성을 지르는 녀석들은 확실히 공부 좀 하는 녀석들이다.

셜록 홈스 13.

뭐를 물어보고, 손을 들고, 체크리스트에 표시하고.

가만 보니 게임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듯.

끝까지 기다리는 녀석들이 승산이 높다.

2시간을 강사 선생님과 함께 아이들 틈에 있었다.

종아리가 딱딱해져 온다.

명렬표를 들고 아이들의 특성을 잡아내느라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특별한 행동들과 생각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 기록으로 남겨주어야 하니.

선생님 하기도 점점 힘들겠다.

몽둥이 어깨에 걸치고 휘휘 활보할 때가 좋았지.

안쓰럽다.

나갔다 다시 돌아온 나 같은 사람들은 입 딱 다물고 부지런히 교실을 드나드는 일.

몸으로 해결할 일이 있으면 일단 팔부터 걷어 올리는 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오고 가는 일.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는 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일.

그래야 눈총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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