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암, 애월한담해안길, 어도오름
< 4. 27. 목 >
손녀와 아침 산책을 한다.
집 뒤에 있는 건물이 문수암이라는 절이었다.
중산간 쪽으로 나 있는 자그마한 길로 차들이 자주 오른다.
산록도로가 있다더니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면 맘먹고 가볼 필요가 있겠다.
바람 한 점 없고, 맑은 모습을 보여 주는 하늘.
제주에 와서 사는 날 중 최고다.
구엄리 돌 염전 앞 애월집.
사위는 원격근무 중이라 우리만 나왔다.
고기국수, 해물국밥, 흑돼지돈까스.
어디를 가나 로봇이 서빙을 한다.
아마 가게들이 주택가와 멀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기가 싶지 않아, 사람 구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음식 맛은 간이 잘 되어있지 않다.
기대보다 못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애월한담해안길을 따라 곽지해수욕장까지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간다.
검은 현무암과 짙게 파란 바다색이 관광객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18개월인 손녀도 흥얼거리는 것을 보니 배우지 않아도 좋은 것은 다 안다.
아직 물이 찰 텐데도 화보를 찍는 여인은 수영복 차림이다.
좀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보지 못해서 아쉽다.
슬쩍 사진 한 장 담는다.
물가로 데려가니 질겁을 하는 손녀,
무섭단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는 모양이다.
얼굴을 끓이고 있는 햇빛, 다행히 모자를 벗지 않은 아이.
헉헉거리며 돌아오는 두 시간의 육아 사역.
여자들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 위 카페.
팀블로우(제주시 애월로 19)에 앉아있다.
인정사정없는 알바생이 아이까지 일 메뉴를 시켜야 한다고 해서 가족 일행이 나가버렸다나.
분위기 있는 음악과 날씨는 최고인데, 이 집 평에 손해 좀 보겠다.
별관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16개월 꼬마.
엄마는 아이가 왜 계단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단다.
내 손녀만 할까.
허벅지에 근육이 생기도록,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 시키는 일인지도.
어도오름
주차장도 없는 한적한 길이다.
얼멍얼멍한 타이어로 길을 놓았는데, 풀들이 거의 덮었다.
숨 한번 크게 쉬니 정상 분화구다.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도록 나무 데크로 길을 놓았다.
얼마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큰 소나무 밑을 파고 쉬던 고라니가 놀라 뛴다.
작은 나무 묘목을 심어놓기는 했는데,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바지에 묻은 진드기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큰딸과 손녀는 생에 처음 오르는 오름이란다.
좀 근사한 곳으로 갔어야 하는데.
애월읍의 병원
귀가 가렵다는 아내.
벌레가 물었는지, 햇빛 알레르기인지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는 손톱마다 다른 색으로 멋을 낸 중년이 여의사.
약을 한 보따리 들고나와서 한숨을 쉰다.
참 의사 쉽게 한단다.
아침부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근무하고 있는 사위를 위해 일찍 귀가한다.
몇 군데 마트를 들러보지만, 대식구 밥상을 차리는 일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빡!!
악!, 으앙!
손녀의 이마와 딸의 이가 부딪쳤다.
힘이 넘치는 녀석이 뛰다 사달을 낸 것이다.
순간 맨 먼저 스치는 생각은 딸의 이 걱정이다.
내리사랑이라고 마무리 손자가 이쁘다지만 결국 내 새끼가 먼저다.
나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역시 본능인가 보다.
뜨레솥밥
집으로 오르는 도로 초입에 있는 쌈밥집.
사위는 백년손님.
상추 위에 따뜻한 솥 비빔밥을 올리고, 소라 강된장도 듬뿍, 거친 갈치창젓도 조금.
매운 청양고추도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은 천국.
제주살이를 제일 먼저 등 떠민 말수는 적지만 듬직한 우리 사위.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가정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 장한 남자여.
아! 언제나 바쁜 남자들이여.
속을 보여 줄 수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은 비밀의 사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