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서울 나들이에 대한 단상
오늘 서울 논현동에 볼 일이 있었다. 근 일주일 만에 처음 나가는 외출이었다. 출근 시간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보기좋기 빗나갔다. 인천 서구 당하에서 8시 45분에 계양역으로 가는 버스를 탓지만 거의 만원이었고, 김포 공항 역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하여 9시 조금 넘어서 계양역에서 공항 철도를 탔는데 계양역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기서 한 정거장을 가서 도착한 김포공항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에 틀어박혀서 간혹 고개를 들어 계양산 뷰를 보며 책만 보던 나의 시선이 너무 좁아져 있어서 인지 실로 오래간만에 겪는 '넘치는 인파로 가득한 버스와 지하철'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재직중 나의 출근 시간은 보통 05시 전후였다. 그래서 08시 45분은 내게 있어서 매우 정상적인 근무시간이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 시간에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까지의 학창시절에 맛본 만원 버스의 맛을 2024년에 내가 다시 조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지하철이 리듬을 타고 앞뒤로 흔들릴 때 느껴지는 기분은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꽤 큰 불안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사실 더 불편했던 것은 전철 안에 꽤 많은 여성분들이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들로부터 괜한 오해를 사서 곤란한 처지에 몰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거의 28년 동안 자차 운전으로만 출퇴근을 해서 만원버스나 만원지하철을 꽤 오랜 기간동안 경험하지 못했는데 가끔 나오는 뉴스를 보면 그런 혼잡한 곳에서 불가피한 접촉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때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접촉이 이루어질 경우 접촉을 당하는 사람이 불쾌하게 느낀다면 그것을 문제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를 삼는 경우는 대부분 불쾌한 접촉이었을 것으로 생각은 된다. 그러나 그중 분명히 억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난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내게 약간의 불편함을 준 것이다. 인파로 가득한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걱정해야 하는데 그런 걱정은 거의 없었다. 사실 요즘은 소매치기에 대한 뉴스도 거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소매치기가 직종을 치한으로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염병할 놈들이다. 그놈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뿐만 아니라 보통 남성들이기도 하니 말이다.
두려움까지는 아니지만 꽤 불편한 마음으로 가까스로 신논현역에 도착했고 나는 이제야 풀려나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목적지인 '공간102'까지는 7분 거리였다. 공간 102는 전문 대여 사무실이다. 잘해야 1.5평 정도 크기인데 거기에 6인용 탁자와 의자, 정수기,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작은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한 시간당 1만원에 대여해 주는 24시간 공유 사무실이다. 그 좁은 공간을 그런 사업 아이템으로 활용하는 업주의 수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5층 원룸 건물의 1층 구석에 있는 기둥 옆의 완전히 죽은 공간을 시간제 임대 사무실로 활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그 임대 사무실의 주인과 건물주는 동일인 임이 틀림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목적지인 '공간 102'까지 걸어가는데는 약 7분이 걸렸다. 그 7분은 내게 한 계절을 보내는 듯한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개인 재무 설계사(CFP)와의 재정 상담 약속이라는 주 목적이 있었지만, 그 7분 동안 걸어가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나를 30년 전의 기억 속으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파랗다 못해 퍼렇게 질린 맑은 하늘이었다.
80~90년대의 하늘이 늘 그렇게 맑고 파랳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대부분 맑은 날에는 하늘의 색이 퍼렇게 질린듯 파랬다. 오늘 내가 오전 10시에서 10시 07분까지 걸으면서 넋을 놓고 볼 수 밖에 없었던 하늘이 그랬다. 퍼렇게 질려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요즘 하늘을 볼 여유가 있다.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볼 여유가 별로 없다. 바쁘게 뭔가를 향해서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개를 25도 정도 올려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다. 생각할 수도 없는 여유부리기일 수도 있다. 일찍 도착하여 여유가 있었던 나는 신논현역 지하철 1번 출구를 나오면서부터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그 시퍼렇게 질린 하늘을 보면서 걸었다. 비록 7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에 나는 '지금이 순간'을 살 수 있었고 행복했다.
우리가 속도에 지배당한지는 꽤 된 것 같다. 빨리빨리의 민족이라는 칭찬같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온 국민이 듣고 있으니 우리가 속도에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터넷도 세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빠르고, 관공서의 업무 처리도 빠르고, 식당에 가도 초고속으로 음식이 나온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개선 활동을 통하여 업무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매일매일 개선한다. 이사를 해도 그 큰 트럭으로 짐을 순식간에 옮겨서 아무리 늦어도 12시간이면 거의 완벽하게 나의 모든 짐을 새로운 집으로 이동시킬 수있다.
당신이 회사원이라면 엑셀을 사용할 것이고, 그러면 다양한 단축키를 사용하여 더 빠른 업무를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더 빨리 더 많이 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속도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다. 그 덕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지금의 이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그런 성향은 꼭 비난만 받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약간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KTX를 타 봤을 것이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밖을 내다보면 원경은 그래도 그럭저럭 시선에 담을 수는 있는데 근경은 도저히 우리의 동체시력으로는 담기가 불가능하다. 휙 휙 하고 지나가는 통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목적지를 향해 내 달리는 KTX와 한 몸이된 우리도 그냥 빠르게 이동만 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빠르게 이동만 하는 것은 아닐까? 삶의 순간순간을 살아가지 않고 단지 '빠르게 움직이면서 이동만 하면서' 삶을 채우는 것은 아닐까?
나도 나의 지난 많은 시간을 이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만 채웠을지도 모른다. 빠른 속도로 뭔가를 계속 해 내면서 목적지에만 이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시선은 늘 저 멀리 떨어진 미래에 고정되어있고 그 미래(내년, 10년 후 혹은 은퇴 이후의 편안한 삶)를 대비하기 위하여 현재를 소모하면서 '매 순간'을 빠르게만 살아온 것 같다. 30년을 직장에서 보냈지만 내게 남은 직장에서의 기억은 위 철로와 같이 흐리고 애매하다. 물론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맑고 밝은 사진은 아닌 것 같다.
3일간 비가 온 후여서 오늘은 날씨가 더 맑았고, 덕분에 나는 짧은 시간이나마 퍼렇게 질린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돌아와 다시 계양역에 내렸을 때에도 계속 하늘은 맑아있었고,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내 눈으로 보기만 하면 그 아름다움과 청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쁜 회사 생활 혹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짬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쉽지 않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휴식을 취하고 동료와 담소를 한다. 그들로부터 떨어지라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혼자서 걸으며 그 순간을 느껴보기 바란다. 당신의 이동 속도를 최대한 느리게하여 주변의 돌하나 나무하나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보라. 아마도 그 순간은 반드시 당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그 찰나의 순간이 당신에게 당신의 나머지 삶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