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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슬플 땐 달리기를 해

내가 주기적으로 10km를 뛰는 이유

by 옹기종기

누구나 살다 보면 인생이 마치 서울의 아침 출근길처럼 꽉- 막힌 듯할 때가 있다.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살이 찐 것도 아닌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오랜 시간 지켜온 나만의 규칙들이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듯 조금씩 무너져 간다. 평소에 흥분되고 재밌기만 했던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손에 잡힐 것만 같던 희망찬 미래도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우리는 이걸 아주 오래 전부터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아무리 정신 상태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시기가 되면 누구라도 이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유일한 대체법은 언제나 그렇듯 '이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를 찾아온 무기력이 자연스레 나를 떠나갈 때까지 담담하게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우리를 찾아오는 슬럼프란 반갑지 않은 손님에 익숙해져 간다.


다만 나에게는 슬럼프란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억지로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특별한 행동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힘들어할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도록 죽어라 뛰는 것이다. 시간은 1시간, 거리는 10킬로미터.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억지로 산책로에 나가 기계적으로 뛰고 있으면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내게 슬럼프가 찾아왔음을 잊어버린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있는 가을 햇빛 아래 뻣뻣하게 굳은 몸을 맡긴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자 억지로 내딛던 한발 한발이 기계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불규칙하게 이어지던 호흡도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오랜 시간 앉아만 있어 제 기능을 못하던 몸은 거리를 더해 갈수록 빠른 속도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간다. 멈추고 싶다는 욕구를 꾸역꾸역 참아가며 결승점에 다다랐을 때, 복잡했던 내 머릿 속엔 모든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오로지 단 한 가지 '힘들다!'란 생각만이 가득히 남아있다. 몸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간 후 찾아오는 그 '공백의 달콤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평온을 내게 가져다준다.


그 순간의 평온을 위해 나는 오늘도 정기적인 슬럼프가 찾아올 때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집 앞 공원의 러닝 트랙에 올라 나에게 주어진 10킬로미터를 묵묵히 달린다.


이렇게 난... 슬플 땐 달리기를 한다.


(배경 출처: 천계영 작가의 <언플러그드 보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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