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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03. 2024

<정선주> 1화

카푸치노 캔 커피

 그녀의 이름은 정선주. 내 대학 동기이다.


 그녀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사립 미션 스쿨 출신이었다. 미션 스쿨 진학이 부모님의 강제적인 뜻이었는지, 자기의 독실한 종교적 의지였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뭐, 직접 물어보면 알 수는 있었을 테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어느 정도 신앙심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술잔이 오고 가는 학과 행사 때도 술 대신 콜라나 사이다를 맥주잔에 채워 놓고 주변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짠하고 건배를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마치 술을 몇 잔 마시고 알코올에 이성을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유쾌하고 호탕하게 주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다. 입학 후 그녀와는 일대일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워낙 날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향이기도 했고, 그녀는 늘 자기와 비슷하게 활달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암튼 그녀는 내가 살고 있는 행성과는 다른, 밝은 사람들이 밝게 모여 사는 별의 귀족 같은 분위기를 은연중에 내뿜었다.


“야, 변수남! 여기서 혼자 궁상맞게 뭐하냐?”


 그녀는 개강한 후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 왔다. 그런데 몇 년 알고 지낸 동네 친구처럼 ‘궁상’이란 단어를 선택하고 표출할 수 있다니……. 그녀의 과감함이 과감해 보였다.


“궁상은 아니고 그냥 공상 중이야.”


 단어 싸움은 나도 지지 않았다. 이래 봬도 내 정체성은 작가를 꿈꿔왔던 문학 소년이었다. 남과의 소통 능력이 부족하여 궁상이란 말에 별 대꾸를 못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대꾸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대꾸를 내뱉는 순간 나 자신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오~~라임 보소? 말맛을 살릴 줄 아네, 역시.”


 그녀는 내 대답을 ‘이상한 듯’이 아니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역시’라는 단어는 왜 선택한 거지? 내가 말맛을 살릴 것이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의미 같은데.


“그래 공상가 학생, 혼자서 어떤 엉뚱 기괴한 것들을 음흉하게 생각하고 계셨나?”


 그녀는 새로운 흥밋거리라도 발견한 듯 대화의 끈을 계속 놓지 않았다. 지구 모처에 떨어진 우주선에서 발견된 외계인에게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우주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처럼. 접촉을 시도하니 반응은 해줘야겠지. 그렇지만 내 마음에 다가왔던, 방명록 속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내 비밀스런 알몸을 남 앞에서 굳이 드러낼 필요까진 없었다.


“그냥, 등나무꽃이 풍기는 향기에 취해서 문학적 영감을 얻는 중이었지.”


 적당한 말로 날 포장했다. 그녀는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녀의 눈꼬리가 가늘게 처지면서 아름다운 곡선이 만들어지더니 미(美)적으로 완벽한 눈매가 완성되었다. 웃는다는 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마취 주사가 되어 날 경직시켜 버렸다. 난 학창 시절 잘 웃지 못했다. 일종의 콤플렉스랄까? 난 웃어버리는 순간 하회탈의 눈매가 되고 말았다. 친구들로부터 놀림의 타겟이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웃을 때마다 놀림을 받다보니 난 웃음이란 녀석을 감정의 지하 감옥에 별다른 죄목도 없이 오랫동안 가두어 놓은 상태였다.


“넌 글 쓰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녀가 더욱 관심을 보이며 나와의 거리감을 좁히려 했다. N극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자성을 N극으로 밀어내기 싫었다. S극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솔직해지자. 그녀와의 대화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대화가 끊기는 건 왠지 싫었다.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생(生)의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응, 대학에 오기 전까지 작가가 꿈이었어.”

, ‘작가가 꿈이었구나. 이젠 사범대에 진학했으니 작가 선,,으로 꿈이 바뀌었겠네?”


 그녀는 마치 언어로 만든 공을 가지고 현란하게 드리블을 치며 날 농락하는 것 같았다. 그녀라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돼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비록 짧게 오간 대화였지만, 난 그녀 주변에 사람이 왜 많이 몰리는지 직관적으로 감을 잡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고, 상대의 감정에 기분 좋게 공감해주고, 유쾌하게 호응해주는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너 지난 번 예비대학 때 삼겹살집에서 토하고 쓰러지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던데?”


 그녀는 알코올변태 선배가 기획, 연출한 ‘단지 맥주를 들이켰을 뿐인데’라는 작품을 인상 깊게 시청한 것 같았다. 알코올쓰레기란 사실도 민망하긴 했지만, 테이블에 마른오징어처럼 널브러져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어딘가에서 흥미롭게 지켜보았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민망을 넘어 망신스러웠다. 적당한 대꾸를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알맞은 대꾸가 생각나지 않았다.


“음, 그..그건 가식으로 뒤덮인 나의 위선을 시원하게 토해버리고 나의 참 자아를 되찾기 위한 일종의 행위 예술적 퍼포먼스였어.”

푸하하하.”


 나의 말 같지도 않은 허언(虛言)에 그녀는 단전에서부터 웃음의 기운을 펌프질하여 사정없이 밖으로 분출했다. 다시 한번 초승달 모양의 완만한 눈매가 그려진다. 함박웃음을 지으니 입꼬리가 귀까지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더욱 크게 벌어졌다. 입술이 이에 붙어 있는 건지, 이에 입술이 붙어 있는 건지 마치 입술과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원래부터 하나로 이루어진 신체 부위처럼 보였다. 입꼬리, 입술, 이가 삼위일체 되어 거룩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난 웃을 때마다 나오는 저주받은 하회탈 눈매와, 약간 벌어진 앞니로 인해서 입을 크게 열고 웃질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맘껏 웃을 수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웠다. 그때 사범대 2호관 안에서 여자 동기들이 양식장에서 탈출하는 물고기 떼처럼 중앙 현관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주야, 밥 먹으러 가자. 오늘 학식 메뉴 돈가스래.”

어머?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네? 작가 선생, 넌 밥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갈래?”

아니, 난 이따가 남자애들이랑 먹기로 했어. 맛있게 먹고 와.”


 애초에 한 녀석 빼고는 나랑 밥 먹을 남자 동기들이 있을 리가 없다. 난 학교 후문에서 하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동기들이랑 어울리지 않고, 하숙집에 잠시 복귀하여 아침에도 먹고 나온 그 반찬을 저녁에도 먹지 않기 위해서 완벽하게 해치워야 했다. 밥에 집착하는 건지 아니면 나한테 집착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에게 껄떡거리는 남자 동기 한 녀석이랑 밥을 먹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오늘은 왠지 매일 반복되는 하숙집 밥보다 그녀와 함께 돈가스를 먹고 싶었다. 한 번만 더 권유해줘. 두 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가 바로 나야.


“그래? 그럼 다음에 같이 먹자. 행위 예술에 대한 작가 선생의 자의적이고 억지스러운 비평 잘 들었어. 안녕.”

 

 간절하게 보낸 텔레파시가 그녀에게 닿질 않았나 보다.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돈가스를 먹으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젠 헤어짐이군. 아쉬운 마음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마성의 블랙홀을 떠올렸다.


“아, 맞다. 이거. 아까 혼자 궁상맞게 앉아 있길래 특별히 누나가 자판기까지 달려가서 손수 뽑아 온 거야.”


 그녀는 떠나기 전 나에게 뭔가를 건넨 후 여자 동기들과 함께 학식을 판매하는 학생회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 동기들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녀가 내게 슬며시 놓고 간 것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캔 커피였다. 손바닥으로 캔 커피를 감싸니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캔에는 분홍빛 여성스러운 포스트잇이 위태롭게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급하게 쓴 듯한, 하지만 익숙한 필체의 메모가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


‘뚜껑 따기 전에 캔을 마구 흔들어봐. 그럼 카푸치노 커피가 될 수도. 다만 뚜껑 열 때는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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