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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r 28. 2024

<변수남> 2화

두번째 변수

 첫 번째 변수의 이끌림대로 나는 지방 국립대학교의 국어‘교육’과에 입학을 했다. 국어교육과는 각 학년 정원이 20명씩으로, 4학년 선배들까지 다 합치면 80명 정도 되는 일종의 마을공동체와도 같았다. 내가 입학한 연도(1999)의 끝 두 자리로 내 학번 앞 두 자리가 99로 결정되었다. 99학번은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비공식적으로 비둘기학번으로도 불렸다. 2, 3, 4학년은 학년 정원 20명 중에 남학생이 2, 3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여초현상에 시달렸다. 하지만 비둘기학번은 여학생들이야 교사를 선호한다고 치더라도, 나처럼 제1지망 꿈이 꺾인 남학생이 많았는지 비교적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교사를 꿈꾸며 남자 열 명, 여자 열 명의 기가 막힌 성평등화가 이루어졌다. 남자가 10명이나 신입생으로 들어오다니, 축구를 애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예비역 선배들은 드디어 우리 과 단독으로 축구팀을 꾸릴 수 있겠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풍문이 있었다. 뭐,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기 전, 새내기배움터라는 예비대학이 열렸다. 교수님들과 선배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간단히 가진 후, 삐약거리는 신입생들을 인솔하여 교정 이곳저곳을 수건돌리기 술래 잡듯 긴박하고 바쁘게 누볐다. 이곳이 사범대 1호관이다. 저곳이 2호관이다. 사범대 2호관 건너편에 보이는 큰 건물은 아궁이라고 불리는 대학도서관인데 레포트 쓸 때나 모둠 회의를 할 때 많이 찾게 될 것이다, 술 마시고 버스가 끊겼을 때 밖에서 얼어 죽기 싫으면 아궁이에 들어가서 도둑 고양이처럼 하룻밤을 지샐 수도 있다, 그리고 저쪽에 보이는 작은 언덕은 응큼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야밤에 응큼동산을 기웃거리다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청춘남녀의 혈기 넘치고 에너지틱한 15금 장면이나 운이 좋으면 19금 장면까지도 목격할 수 있다, 와 같은 대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알차고 귀한 정보들이 홍수처럼 분출되어 나왔다.


 저녁 빛이 낡아 빠진 레드카펫의 모서리처럼 교정에 깔리기 시작하자, 드디어 예비대학의 하이라이트인 환영회 자리가 대학 후문의 ‘단체모임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린 삼겹살집에서 열렸다. 외국 햄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얇게 저민, 1인분에 1,500원짜리 수입산 대패 삼겹살이 우리의 식사 거리이자 안주 거리이자 노동 거리가 되었다. 돼지 지방을 인공적으로 붙여서 만든 가짜 삼겹살은 불판에 열기가 더해질수록 살코기와 지방이 분리되는 오묘한 마법을 부리면서 그 가식적인 정체가 탄로 났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인공 삼겹살의 정체따위 논할 틈도 없이 위장이 먼저 반응하여 핏물도 안 가신 고기를 그냥 뱃속으로 우겨 넣기 바빴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호랑이 같던 아버지의 엄한 훈육방식 덕분에 술, 담배, 여자 인간으로부터 거리가 상당히, 아주, 꽤 멀었었다. 아니, 아예 그것들에 대해선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학생 신분으로 술 마시는 친구, 학생인데 담배 피는 친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학생 주제에 여자 인간과 연애하는 친구들을 뭔가 인류라기보단 신이 만들다가 실패한 종(種)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난 순진무구했다. 난 일반적인 샌님보다 한 등급 위인, 돋보기 뿔테 안경을 쓴 샌님이었던 것이다. 대학은 어찌 보면 샌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간일지도 몰랐다. 술, 담배, 여자 인간에 완전 노출된, 동물 우리밖의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이젠 날 감시하는 호랑이 아빠도 없었다. 남에게 술을 먹일 때만큼은 왠지 모를 지배적 쾌락을 느낀다는 알코올변태 선배의 권유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롱한 맥주님을 영접하였다. 겉보기에는 시중에 판매하는 탄산 가득 청량한 맛의 보리 음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학창 시절에 그 보리 음료 꽤 많이 마셨었지. 보리의 묵직함과 톡 쏘는 탄산의 앙상블. 그래 아는 맛이다. 맥주나 보리탄산음료나 거기서 거기겠지. 명품 와인을 시음하듯 조심스레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황금보리가 선사하는 깊고 고소한 풍미와 청보리의 개성 넘치는 신선한 맛이 만나 지금 내 입 안에선 근사한 맛의 향연이 펼쳐질... 리가 없었다. 황금보리고 청보리고 나발이고 내 입 안은 온통 알코올 쓴 맛이 기분나쁘게 퍼지기 시작했다.


“웩!!”    


 뱉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술을 뱉어버리는 순간 난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혐오한다는 안기부(안주 기습 부대,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먹는 사람) 요원이 될지도 몰랐다. 이건 한약이다, 몸에 좋은거다, 라는 최면 같은 신호를 뇌로 서둘러 보냈다. 의지박약증에 걸린 혀는 힘든 레이스를 끝내고 싶어 목젖과 식도에게 다음 바통을 꿀꺽하고 넘겼다. 그날 난 맥주 세 잔을 먹은 후 화장실에 가서 그날 먹은 가짜 삼겹살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알코올변태 선배가 어느새 따라와서 ‘괜찮아?’를 알람처럼 반복하며 익숙한 솜씨로 내 등을 리듬감 있게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변소남’이라는 기막힌 별명도 손수 지어주었다. 내 안에 있는 위산과 가짜 삼겹살을 모두 비워내고 자리로 돌아갔지만 난 일격필살에 명치를 맞은 사람처럼 테이블 위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국어교육과 학생회실은 늘 수업이 없는 학생들로 북적댔다. 교실 하나쯤 되는 공간 가운데에 불법으로 칸막이를 설치하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자유의 공간과 경건하고 엄숙한 회의 공간을 철저히 분리했다.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간은 말 그대로 늘 웃고 떠드는 학생들로 넘쳤다. 똥폼 가득 장전하여 짧은 다리를 억지로 꼬고 얼굴은 비스듬히 기타 헤드를 응시한 채 튜닝을 하는 건지, 하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튼 모든 세팅을 끝내고 민중 가요를 부르고 있는 남학생 1, 어제 나갔던 소개팅에서 이상형인 남자를 만나 드디어 진짜 인연을 찾았다고 혼자 설레발치는 여학생 1과 감정이 안 섞인 듯한 과한 리액션으로 여학생1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학생 2와 3. 창가에 기대서 세상 고독한 표정을 한 채 홍콩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드러지게 담뱃불을 부친 후 답답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무거운 한숨을 푹 쉬며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예쁜 여학생들을 음흉하게 관찰 중인 예비역 선배 1, 벗어 놓은 양말처럼 학생회실 중앙테이블에 널브러진 방명록을 정성스레 쓰고 있는 뿔테 안경을 쓴 샌님 한 명.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예전 선배들로부터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는 문화가 바로 학생회실 방명록이었다. 방명록으로 명명한, 스프링 달린 연습장 겉표지엔 ‘둘기네집’이라고 검정색 유성싸인펜으로 굵직하게 써져 있었다.(매해 방명록의 타이틀은 당해연도 학번의 애칭으로 적어 왔던 게 관습이었다.) 올해 신입생들을 ‘비둘기’라고 불렀기 때문에 방명록의 타이틀도 ‘둘기네집’으로 결정되었다. 타이틀만 보면 신입생들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공간이라고 느껴지지만, 사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든 국어교육과 학생들이 다양한 사연(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익명 사랑꾼의 사랑 고백 등)과, 그날의 소소한 감정(술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 등), 미래에 대한 걱정(난 참 교사가 될 수 있을까 등), 등이 마구잡이로 적혀 있었다. 보통 익명으로 기록들을 했으나 필체라는 아이덴티티적인 증거와 앞글과 뒷글 사이의 타임라인과 공강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유추하여 글을 쓴 범인은 기가 막히게 하루 안에 다 검거가 되었다. 익명의 범인을 기막히게 검거한 학생들은 아무래도 국어교사보단 프로파일러가 훨씬 어울려보였다. 비록 몸은 국어교육과에 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국어국문학과에 대한 열망이 컸기에 나는 뇌가 일으키는 창작의 폭풍질에 휩쓸려 나름 문학 흉내를 내는 글들을 방명록에 자주 끄적여댔다.


 하루는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斷想)’이라는 글을 적은 적이 있었다. 거품이 잔뜩 낀 카푸치노 커피에서 영감을 얻어 진정한 사랑이란 커피잔 위에 떠 있다가 금방 사라지는 거품이 아닌, 거품 아래 꽁꽁 숨어 있는 달콤한 커피와도 같다. 사람의 겉모습(거품)보다는 내면(거품 속에 감춰진 커피)을 바라보는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라는 단상(斷想). 내가 쓴 글 밑엔 각양각색의 꼬리 글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처럼 달렸다.


‘글씨가 괴기체스러운걸 보니 변수남이 쓴 게 확실함. ㅋㅋ.’


‘수남아, 그놈의 사랑 타령 좀 그만해라. 글 쓸 시간 있으면 스타크래프트 연습이나 더 해라.’


‘사랑의 의미에 대한 통찰. 꽤 인상적이야. ^^’


 내 정체를 대번에 알아맞히고 날 깎아내리는 내용의 답글들은 보나 마나 남자 동기들의 짓임이 분명해 보였다. 남자 동기들의 깃털같이 가벼운 헛소리야 이젠 지쳐버린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적으로 조건 반사가 되어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허전한 그 어딘가를 툭 건드려버린 한 문장은 내 마음 속에서 불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가, 어쨌든 정체 모를 감정의 씨앗을 몰래 심어 놓았다.


‘사랑의 의미에 대한 통찰. 꽤 인상적이야. ^^'


 글씨만 가지고 성차별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이 글씨체는 장담컨대, 내 근사한 이름을 걸고, 절대, 남자 인간의 흔적이 아니었다. 반드시 아니어야 했다. 여성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묻어 있는 섬세한 필치와 부드럽지만 유려한 획…….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조숙하고 풍부한 감성의 핀을 꽂은 여성이 쓴 게 틀림없다고 강하게 확신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남자 인간이  '^^' 이라는 상큼한 특수기호를 징그러운 웃음을 지어 가며 그리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오래된 거미줄이 사무실 이곳 저곳을 점령해 나가고 있는 탐정사무실 속 사립 탐정이 오랜만에 의뢰받은 사건 속 범인을 쫓는 것처럼 저 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에너지를 허비하며 기어코 밝혀내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내 마음속 아무도 모르는 깊고 은밀한 곳에 부드러운 온기가 스민 저 문장을 새겨놓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뭔가 결말을 알아버리거나, 목적지에 도착해버리면 보통 시원한 감정이 들 것 같지만, 난 오히려 결말에 도착해버리면 영혼이 쫙 빠져나간 듯한 허무한 감정 비슷한게 찾아왔다. 비밀스럽고 끝날 줄 모르는 결말을 위해 은은하게 계속 다가가는 것, 결말의 마지막 지점에 거의 다다랐지만 끝내 그 선을 넘지 않는 것, 난 이런 부류의 엉뚱한 인간이었다.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흥분과 설렘, 긴장감, 초조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그냥 계속 그런 감정들을 마음속에 고이 담아두고 싶었다. 수학여행도 마찬가지다. 떠나기 전날 밤의 설렘이 날 흥분시켰지, 막상 수학여행 중이거나 여행을 갔다 온 후에 집에서 여행 가방을 정리하며 남는 것은 오직 공허함뿐이었으니…….


 방명록은 단절된 세계에 갇혀 사는 내 침울한 자아가 그나마 세상과 소통하고 남들에게 새색시처럼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내가 만들어 놓은 몇 겹의 두꺼운 문을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서툰 솜씨로 만들어 놓은 카푸치노 커피를 진심으로 맛있다며 먹어주는 그녀가 누구일까라는 호기심은 불 붙듯 일어났다가도 다시 물로 끼얹은 듯 사라졌다.


 사범대 2호관 앞은 등나무 아래 놓여 있는 벤치가 낭만적인 기류를 뿜어 내는 봄의 명소와도 같았다. 특히 등나무꽃이 피는 5, 6월경이 환상적이었는데, 그곳엔 등나무꽃이 포도알처럼 대롱대롱 피어 있었고 사람들은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등나무꽃이 선물해 주는 보랏빛 향기에 취하는 걸 좋아했다. 간혹 예비역 골초 선배들이 거기에서 구름과자를 뻑뻑 피워대면 비흡연주의자인 감성 가득한 여자 선배들은 예비역 선배들을 향해 인간들이 아니라며 거친 욕을 해 대는 걸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그곳은 사범대 2호관 학생들에게 아늑하지만 뭔가 성스럽고,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그린벨트같은 공간이었다. 인문학 교양 수업을 듣고 사범대 2호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등나무꽃이 뿌려대는 페로몬에 취해 저절로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향수‘라는 광고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등나무 꽃향기를 심호흡하듯이 천천히 마셔봤다. 오감의 동물이지만 지금은 오로지 후각이라는 감각에만 집중을 했다. 꽃향기가 내 큰 콧구멍을 통과하여 내 후각 신경 세포를 자극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은 다문 채, 양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오로지 신경 세포가 느끼는 그 감각에만 고도의 집중을 했다. 갑자기 한 문장이 산들바람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사랑의 의미에 대한 통찰. 꽤 인상적이야. ^^’


 뭐..뭐지? 이 문장이 왜 다시 떠오르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난 결말의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중도 포기자인데 자꾸 마음은 그 선을 넘으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내 글을 알아주는 데서 오는 감동의 여파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아가면서 사랑에 빠지고 싶은, 20대 청춘의 불꽃 같은 사랑학 개론일까? 눈을 번쩍 떴다.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그 정체 모를 문장에 이리 마음을 뺏겨버려 자꾸 생각이 난다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 마음과 의지는 이미 문장 주인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문장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여자 선배일까? 아니면 내 동기? 추리는 여기서 끝나버렸다. ‘여자가 썼을 법한 필적’이라는 단서 외에는 추리를 해 나갈만한 그 어떤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맘속 반대편에서는 ‘사실은 남자가 여자인척 쓴 필적’이라는 변수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글씨의 주인공이 여자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훗,하고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며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등나무 아래에서, 내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치며 날 불러 세웠다. 내 어깨에 전해지는 손의 감촉은 봄빛처럼 포근했다. 오감의 동물인 나는 후각에서 촉각으로 감각의 전이를 하고 촉각의 근원을 찾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국어국문학과가 아닌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내 인생 첫 번째 변수가 끝나자마자 두 번째 변수는 자기가 등장할 차례를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예상치 않게 갑자기 찾아왔다.


“야, 변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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