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여다볼 것인지 올려다볼 것인지의 선택은 오롯이 하는 사람 자신의 몫이다. 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고 굳이 장/단점을 이야기할 필요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체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먹거리와 건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지식이 아닌 지혜로웠던 과거의 어머니들을 보자.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어 북쪽 하늘의 북두칠성을 향해 깨끗한 정한수 한 그릇을 마련해 앞에 두고 가만히 기원한다. 가족 모두가 잘 먹고 건강하게 해 돌라는 염원을 담아서.
북두칠성은 정북에 해당하는 북극성 주위를 도는 큰곰자리 중의 7개 별로 예로부터 북극성을 보호하고 보좌하는 역할로 먼 과거부터 알려져 있다. 어머님은 하늘에 떠 있는 여러 별을 올려다보고 소중한 염원을 동시에 기원하는 게 아니라, 정한수에 내려와 현신한 북두칠성을 정확히 모셔놓고 염원하셨다. 북극성은 우주를 주재하시는 하늘님이 계신 곳이라 일일이 다 챙기시지 못함을 아시고, 대신 보호의 의미가 강한 북두칠성에 기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건강과 먹거리와 관련해서도 올려다보는 것이 불리할 수 있다. 첫째 이유로는, 자신과 북두칠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물 안에서 북두칠성과 독대하듯이 무인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제3자의 개입을 불허한 것이다. 둘째로는, 올려다봄으로써 자신의 뒷모습 또는 그림자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아픔이나 슬픔 또는 깊이 숨겨진 염원은 항상 그림자 속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거리와 건강은 내려다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내려다보는 것과 파헤치는 것은 아주 다른 의미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내려가는 파헤침이 아니라 전체를 먼저 조용히 조망하려는 내려봄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려다볼 수 있게 되려면 나의 심상이 지구를 떠나야 한다. 지구와 달과 태양이 내 심상 안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곳, 그 어디라도 내 심상이 위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지구를 떠나야 하지? 첫째로, 지구에 나의 몸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우주에서 지구로 보내는 에너지들에 대해 내 몸이 어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전체적 조망만이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둘째, 이리저리 즐겁고 바쁘게 때론 힘겨워하는 자신의 뒷모습(그림자)과 마주할 수 있게 해 준다.
내려다봄은 음적이고, 올려다봄은 양적이라 할 수 있다. 음양이라는 단어가 비과학적, 주술적 느낌이라는 의견도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음양은 누가 뭐해도 심지어 첨단 과학의 시대인 지금도 변화와 균형 그리고 순환을 의미하는 유일한 진리이며 항상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 현대 첨단 과학도 우주의 99%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로 채워져 있다고 추측한다가 지금도 공식적 입장이다.
지구를 떠나 내려다봄으로써 지구에 남겨진 자신의 신체가 바삐 돌아다니고 있고 그러면서도 항상 들러붙어있는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오랫동안 그림자에 속에 포함된 결코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부분도 위로할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림자 속의 여러 존재들은 결단코 들어내어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와 같이.
제일 높은 시상대에 올랐어도 그림자는 늘 있듯이, 그림자는 존재 이유이자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또한 또 다른 나이다. 왜냐면, 그림자가 없음은 음양이 분리된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부정할 대상이 아닌 줄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올라와 심란하게 하지만, 툭 튀어 올라온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진짜 슬픔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힘, 관용을 알게 한다.
삶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할 때도 들여다봄이 유리하다 하겠다. 현재라는 지점에서 정확히 나의 좌우에는, 왼쪽은 변화를 잃어버린 정해진 시간(+)과 현상만 있는 공간(-)이 존재하는 과거이고, 오른쪽은 공간(-)이 정해지지 않고 변화하는 시간(+)만 존재하는 미래이다.
그러나 만약, 현재 지점 기준이 아니고, 심상이 지구를 멀리 떠나서 현재 시점을 본다면, 항상 곧바른 직선인 줄 알았던 시공간 직선이 무한대로 펼쳐지면서, 결국 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순환의 동그란 형태의 고리가 보인다. 이것은 우주의 절댓값이자 시간/공간의 의미를 지닌 빛도 휘어진다는 사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 원의 상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면, 멀어져 간다던 과거는 오히려 현재에게 오고 있고, 앞으로 경험할 미래는 오히려 과거에 내가 경험한 시공간이 이었다는 것을 전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정확한 일직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찬란한 미래 등은 이렇게 지구를 떠나 들여다봄으로써 시공간이 일직선이라는 편견대신 순환의 고리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시공간을 함께하는 바로 선업의 옆사람이, 내 주위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소중한 친구임을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언젠가 순환의 고리에서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에 재회할 것이니까.
인도에 살았던 5년은 순환, 환생에 대한 인도의 힌두교의 가르침을 알게 한다. 5번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환생이 주어진다고 한다. 인생은 원래가 고행이고 신이 내린 테스트로써 5번의 기회가 신의 영역으로 갈 수 있을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다수 인도인은 얼굴이 밝다. 그리고 회의할 때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큰소리는 수양이 부족한 사람의 전유물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먹거리도 화려한 장식과 많은 보조재를 사용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 먹거리를 선택하는 도구로써 가만히 내려다봄이 좋을 것 같다. 건강도 통증이 주는 불편한 증상에 먼저 없애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과학의 힘이 자신에게는 없을지라도 현재의 불편함이 자신의 과거의 무엇을 돌아보게 하는가를 가만히 내려다봄도 좋은 방법이겠다 싶다. 왜냐면, 총 60조 개 세포의 전체 사용자이자 책임자는 나일 테니, 나의 불편함이 나에게만 주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