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아 Hommy

잠깐만 멈췄다가 모든 시간이 멈추게

by 초아


집 없이 약 3주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집이 없다는 게 이토록 불안한 일이라니. 한국에서 집이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호스텔에 묵어도 괜찮고 못해도 공원 벤치에서 자게 될 텐데 그게 뭐 어떤가 하며 극단적인 상상으로 조급한 마음을 다독였다. 가진 것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에도 물질적인 풍요가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지낼 2주 숙소를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었다. 2주는 모든 기본 업무를 끝내겠다는 제출기한이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내 대학과제의 마감기한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사전조사를 성실히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교과서를 들여다봤던 내 학창 시절처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그렇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수는 이왕 이렇게 집도 없는 거 여행이나 가자며 배낭 하나씩 들춰메고 옆 나라 네덜란드로 떠났다.


독일에서 집을 알아볼 때엔 몇 가지 어플이 있다. WG-Gesucht, immonet Immobilien Suche, immowelt, 페이스북 ‘독일에서 방 구하기’, 베를린 리포트 등이 있다. 가격이나 위치등 조건에 맞는 집을 고른 후 메일 혹은 쪽지를 보낸다.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독일에 사는 지인분이 100개 보내면 10개 오는 격이라고 했다. 설마, 나는 다르겠지라고 편협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졌으나 정말 그랬다. 게다가 독일의 입주는 선착순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계약금을 걸어 이 집을 찜하는 형태가 아니라 집주인이 방을 보러 온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집에 살아도 될 사람을 선별한다. ‘빨리’라기보다 ‘정확하게 ‘라는 느낌이다. 약 50개 정도 메일을 보냈더니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로 연락이 왔다. 그중 2개의 방을 보러 갔다. 우리의 예산은 밤미테(방세) 600유로 이내, 위치는 수가 가고 싶어 하는 학교와 가까운 도르트문트나 에센지역 근처, 혹시나 하는 마음에 6개월만 살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하나는 두 명이 밤미테 900유로를 내는 부잣집 동네의 반지층 집이었고 하나는 가구가 하나도 없는 테라스가 있는 아늑한 집이었다. 전자는 동네도 이쁘고 컨디션도 좋았지만 이미 우리의 예산을 훨씬 넘었다. 후자는 가구가 하나도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위치나 가격이 좋았지만 주인분은 다른 세입자를 선택했다. 임시거처 마감기한이 끝나갔다. 마음이 붕 떠 있었다. 또 다른 호스텔을 가도 무기한 연장하게 될까 봐 막막했다.

네덜란드 여행을 가겠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어차피’가 핵심이었다. 어차피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비용으로 하루를 묵게 될 거라면 여행하면서 돈을 쓰겠다는 말이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난 처음에는 선뜻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생각해 보면 똑같이 방세를 내고 똑같이 음식값을 내야 한다면 여행을 하는 게 더 값어치가 있었다. 확신이 든 후에는 네덜란드로 향하는 기차를 예매했고 첫 번째 숙소에서 모든 짐을 싸고 나왔다. 우리의 캐리어는 수가 언어공부를 위해 알게 된 Laura라는 독일친구 집에 맡겼다.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차갑고 음산한 바람이 불어 목도리를 더 따스하게 동여맸다. 독일어로 된 기차 방송을 들으면서 옆나라를 기차하나로 넘나들 수 있다는 건 기이한 감각이었다. ‘여기가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선이야… 근데… 담벼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철조망이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 이제 네덜란드래…!‘

“Sehr geehrte Fahrgäste, wir erreichen in Kürze Amsterdam(승객 여러분, 곧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빠져나올 때의 그 탁 트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암스테르담의 운화를 보고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뻥 뚫려버렸다. 사람들은 헬싱키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키가 컸다. 사람들을 올려다봐야 했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분명 그들과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었음에도 작디작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던 무서움도 내려놓고 나에게도 있던 자유분방함이 꿈틀댔다. 약 3박 4일 동안 많이 걸었고 특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이 시기엔 수와 따로 여행을 했다. 서로의 시간을 가지며 나 역시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스스로 계획하고 예약했다. 하루는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관을 갔다.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자화상’ ‘아몬드 꽃’등 살아있을 때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릴 때만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던 그의 영혼들이 담긴 그림들을 보았다. 불행하고 힘들었지만 그가 붙잡고 있던 그림들에 담긴 노력과 희망이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독일로 돌아오니 이곳이 다시 내 집이 되었다. 감정의 불순물들은 조금 해소되었다. 또 다른 호스텔에서 집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커뮤니티사이트인 베를린 리포트를 통해서 금방 우리가 사는 지역에, 조건과 맞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보러 간 집은 독일에서 악기유학을 하는 한국인 부부이셨는데 굉장히 선한 인상과 우리가 묻는 질문에 꼼꼼히 답해주셨다. 집을 갖게 되면 해야 할 안멜둥(집등록)이나 전기등록 같은 것들이었다. 사정이 생겨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집의 주인분을 소개해줘서 집을 얻었다. 주인분은 1960년대에 독일로 오셨던 파독간호사였던 한국인 할머니다. 독일분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오랫동안 살고 계셨다. 이모는 짙은 화장과 특이하게 형성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독일에 파병됐던 광부와 간호사분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국인 부부가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집주인을 ‘이모’라고 불렀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모’는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따듯한 단어인가 보다. 입주날짜의 맞춰 들어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키를 받았다. 독일은 도어락이 아니라 다 열쇠로 집 문을 연다. 누구라도 손잡이를 따고 들어와도 모를 것 같은, 힘센 남성 두 명이 마음만 먹으면 열릴 것 같은 나무판자 문이었다. 보수공사를 막 마친 집이어서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페인트며 공사 먼지로 가득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한인마트도 들려 장도 보고, 맡겨두었던 짐도 가져오고, 이케아에 가서 침대 커버도 사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닦아도 닦아도 수건에는 먼지가 계속 닦여 나왔다. 3번가량 책상이며 바닥이며 열심히 닦아냈다.


집이 있다는 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인 것 같다. 험난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들어와 에너지 충전을 하는 곳.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지만 아무 말도 걸어주지 않아서, 그냥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줘서 고마운, 침묵할 수 있고, 침묵해도 좋은 곳. 집 밖은 온통 독일어로 가득하지만 이곳은 다시 한국어로 쉬어갈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살았던 대한민국 집은 더 이상 내 공간이 아니고 독일 집, 내가 자고 먹고 싸는 이 집이 이제 내 공간이다.

차근차근, 나를 잃지 않으면서, 고이지 않게 살아가보자. Toi Toi Toi(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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