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산은 무엇보다 아버지의 인생 그 자체이다.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하셨고, 집안의 대소사를 어떻게 처리했으며, 자녀를 위해 무엇을 했는 지 어릴 때부터 우리들에게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얼마 전 안동 농암종가 영천이씨 후손들이 선조의 '효' 사상을 잇고, 문중 간 친목과 선조들의 기념사업 등을 위해 '농암 孝(효) 문화원'을 설립했다고 신문에 나왔다.
"우리 가문은 장수의 전통을 이어왔다. 7대 200여년,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었다. 이런 장수는 결국 농암의 안동부사 시절 80세 이상 남여귀천을 함께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고, 색동옷 춤의 효도로 이어져 왔다"며 "이는 500여년 아름다운 전통이 됐고, 선조 임금의 '적선'(積善) 어필이 내려진 이유가 됐다"고 밝혔다. <2023.7.8. 매일신문>
문학박사 이성원 종손 어르신은 고등학교 때 우리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신 은사님이시다.
나도 농암 이현보 선생의 15대 후손으로 자부심이 있는데, 종손 어르신이
“너희 집 세효당은 농암 후손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매력있는 가문으로 효성도 지극하지만 대대로 문집이 나온 집이란다. 너희 가문이 대구에서 독립 운동도 하고 지금 모두 뿔뿔히 흩어졌는데 흔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거라.” 라고 큰언니에게 말씀 하셨다.
아버지께서 조부모님의 결혼 60주년 회혼례를 올려 드렸다. 회혼례 하면 안 좋다는 얘기도 있어서 아버지가 꺼려하셨지만 할머니께서 원하셔서 반갑게 해 드렸다.
아버지께서 일평생 해 오신 세 가지가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향아! 이리 와서 먹 갈아라.”
자주 사랑방에 불려나가 먹을 갈았다. 한문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시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한지 책을 계속 만드셨다. 아버지도 평생 총 13권의 일기장을 쓰셨다. 일기장에는 아버지만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다. 말년에는 간단한 생활 메모와 하루 지출 수입도 쓰시고 누가 다녀갔다 정도로만 쓰셨다.
병원에서 몸을 못 움직이실 때도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빌려 드렸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여러 번 읽으셨고, 누구 누구의 유명한 대하소설 시리즈들은 거의 다 읽으셨다. 역사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선견지명이 있었다. 당신이 돌아가실 날을 평소에 얘기하셨고
“내가 죽으면 집에서 제사 지낼 자식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과연 아버지 예언대로 한달 차이지만 임종하신 날짜는 거의 비슷했고 아버지는 도포에 정자관도 쓰고 제사를 정성껏 모셨지만 우리들은 공원묘지에서 만난다. 온혜 소나무 우거진 선산을 두고 서안동 IC 옆의 공원묘지에 두 분을 모셨다. 그 당시 반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잘 한 일이다.
서울 부산 수원 등 형제들이 오기에는 공원묘지가 더 편리했다. 산소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같이 식사를 하고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일 년에 설날, 추석은 각자 알아서 부모님께 성묘하고 아버지 기일인 7월 첫째 주 토요일에 산소에서 모인다. 어머니 기일에는 각자의 종교대로 정성껏 절이나 교회에서 추모의 정을 나누며 의식을 올린다. 온혜 선산에 성묘 겸 벌초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모여서 주로 한다.
각 각의 공책 앞장에 우리 형제들 이름을 붙여 놓으시고 등록금이나 공납금을 낼 때마다 영수증을 보란 듯이 붙여 주셨다. 농담으로 “내가 너 교육 시키는데 이만큼 들었다.” 공책의 영수증이 두터워지는 것을 보며 우리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기록과 영수증을 모으신 덕분에 잘 해결된 일도 있었다. 옛날 빨간 벽돌집을 지으며 대출을 받고 완제를 했는데, 자동으로 등기부 전산이 되면서 옛날 대출 받은 것이 처리 되지않고 대출 근저당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께서 하마터면 덤터기 쓸 뻔 하였는데 세무서에 대출 완납한 영수증과 가계부를 들고 가서 증명을 해서 근저당 설정을 풀었다고 하셨다.
우리 집 거실에 자그마한 아버지 사진을 걸어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왜 천붕(天崩)이라고 하는 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비록 병석에 3년 8개월 계셨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처음에는 너무 황망하고 슬퍼서 어쩔 줄 몰랐으나 이제는 의연히 슬픔을 승화할 만큼 마음도 단련되었다.
서울, 부산, 수원, 오산, 안동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이 매주 모이고 한 주 한 주 재를 지내며 큰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고, 모여 있는 동안 아버지를 추모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나들이도 할 수 있어서 지금 생각해 보니 재를 지내는 동안 오히려 행복했었다.
아침 저녁 인사도 하고 말씀도 건네고, 비록 먼 곳에 가셨지만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지켜주시고 계신다고 믿었다. 초재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꿈에 환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젊고 잘 새이긴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아버지께서 새로 이사한 집의 마당과 전망이 너무 좋다며 방 도배 벽지를 만지며 마음에 흡족해 하셨다. 그 때 벌써 아버지께서 좋은 곳으로 가시는구나 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승진할 때 마다 받은 임용장과 상장들이 있었다. 말단 세무공무원인 주사보로 시작하여 축협의 상무이사로 퇴직하실 때 까지 계속 공부를 하셔서 승진하시고 그 때마다 필요한 공부를 하셨다. 퇴직하시고도 일이 바쁠 때 집에서 축협의 일들을 맡아서 서류 정리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유산으로 신안동 빨간 벽돌집과 도산 온혜집(옛날 세효당 한의원)과 논과 밭. 그리고 작은 산들을 남겨 주셨다. 유언으로 별 말씀을 안 하셔서 6개월이 지난 후 자동으로 엄마까지 포함 1/7로 나뉘어졌다.
엄마는 평소에 좋은 청계 논은 누구 주고 신안동 집은 누구 주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못 들은 척 하셨다. 나는 주위의 친구들이 부모님의 장례 후 오빠나 남동생과 유산 문제로 갈등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장례 비용을 정산하고 남은 돈은 공동 기금으로 모아 놓아서 엄마가 요양병원에 오래 계실 때 사용했다. 신기하게도 병원비가 조금 남을 때 논이 도로로 편입되며 보상을 받아서 또 병원비로 사용하곤 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작은 오빠네가 집안 일을 제일 많이 했다. 미국, 유럽, 호주 등 해외여행도 곳곳에 보내 드리고 모든 집안 대소사에 경제적으로 많이 보태 주었다. 형제들에게 고맙고 특히 오빠와 올케언니에게 감사드린다.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 지분도 1/6로 똑 같이 나뉘어졌다.
아직 아버지 만큼은 낙천적이고 성실하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살면서 경험하고 늦게 지혜로 배우는 것들도 많다. '아! 그래서 옛말에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