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고 3때 담임선생님인데 항상 열정을 다해 수업을 하셨다. 밤에는 마리스타 야간 학교에서 수업을 하셨는데 매 시간 수업마다 열강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험을 앞둔 고3이었지만 틈나는 대로 니체나 전혜린의 문학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덕분에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 무렵 고3이었지만 니체나 전혜린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했었다. 수능 한 달 전에 대상포진에 걸려 한 달간 결석을 했는데 병이 나아 학교에 나가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태우러 오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졸업을 하고 얼마 안돼 선생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 한 분은 고 1때 인연을 맺게 된 ‘성문종합영어’를 쓴 송성문 선생님이시다. 군청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허리와 다리를 다쳐 그때부터 만 4년을 내리 병원에 계셨는데, 거기에다 어머니마저 암으로 1년 동안 병원생활을 하셨다. 그때 오빠 둘, 언니 둘, 남동생에 00 씨까지 육남매가 총총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 월급은 반 밖에 나오지 않았으니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당연지사였다. 그 때 성문종합영어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다른 친구들은 과외까지 하는데 영어책 사달라고 할 형편은 안 되고 갖고 싶기는 하고 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성문종합영어 맨 뒷장에 나오는 주소로 성문출판사에 영어공부를 하고 싶은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영어책을 사 볼 수 없으니 테이프를 보내 주시면 나중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면 배로 갚아드리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랬는데 진짜로 영어책하고 테이프가 왔어요. 송성문 선생님이 ‘나도 어렵게 공부를 했으니까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편지하고 같이 온 거예요. 그래 우리 육남매가 큰 상을 위에 책을 펴 놓고 테이프를 들으면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영어 공부를 했어요. 그 뒤로 성문출판사에서 새 영어책이나 새로운 사전이 나올 때마다 잊지 않고 계속 보내주셨어요.
그 때부터 그 선생님이 제 마음 속에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고마운 선생님으로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제가 영어를 전공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이 크다고 봐야할 거예요. 그 선생님을 지난 겨울방학에 처음으로 찾아가 만났어요. 선생님은 휴대폰도 메일도 없어서 그동안 연락드리기도 쉽지 않았는데, 늘 마음만 있고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 연락이 닿았는데 간암으로 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뵈었죠.
감사하게도 이번에 가서도 책을 많이 얻어 가지고 왔어요. 고1 때부터니까 삼십 년이 넘게 이어온 고마운 인연이에요. 그 선생님과의 인연을 곰곰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이 저에게 바라시는 건 아마도 저도 그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베풀면서 살라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두 분 선생님은 살아가는 데 교사로서의 제 삶의 모델이 되어주신 분들이죠. 그리고 또 한 분 제 삶의 모델이 되시는 분은 제 아버지세요. 아버지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항상 낙천적이세요. 4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한 번도 본인이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빨리 일어나서 아이들 공부 시키고 집안 건사할 생각을 하셨고 우리들에게도 늘 긍정적인 생각들을 심어주시고 어려워도 기죽거나 찡그리지 않고 늘 웃으면서 살도록 해 주셨어요.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아버지의 그런 가르침들이 더 크게 와 닿아요.
그리고 남편은 제 삶에 정말 특별하고 고마운 존재죠. 첫 애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고 수술을 하고 했던 그 힘든 시간들을 거쳐 둘째 셋째를 낳고 오늘날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함께 하며 늘 한결같이 아이들하고 내 곁을 지켜준 남편이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두 분 어머님의 희생이 있으셨기에 우리 가족의 행복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부부교사로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말로 고마우신 분들이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시다. 시어머니는 아픈 첫째를 맡아 키우다시피 하시며 사랑으로 돌봐주셔서 첫째는 지금도 새끼가 둥지를 찾듯 할머니 품을 찾아든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 집으로 갔다가 집으로 온다. 밑에 두 아이들은 친정어머니가 키워주셨다. 그래서 둘째는 무슨 일이 있으면 외할머니를 먼저 찾는다. 두 분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이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이 읽는 책도 변해간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어주던 것에서 시작한 아이들의 책 읽기는 전래동화를 거쳐 위인전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거쳐 역사 이야기, 과학이나 환경에 관한 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읽어야 하는 교과 관련 책들도 많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책에다가 필독서라 불리는 책까지, 읽어야 할 책들도 많아진다. 다행히 첫째도 둘째도 막내도 책 읽기가 습관이 되어 있어서 여느 집처럼 책을 읽히려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일은 없다.
“책을 읽어서 가장 좋은 거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자존감을 기를 수 있다는 거예요. 책을 통해 여러 간접 경험들을 하게 되니까 자기의 경우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힘도 생기고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힘든 일이 닥쳐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는 걸 책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한 번씩 아이들 하고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그랬는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각자 하는 것들도 많아지고 자기 생활이 있다 보니까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거나 학교에 태워 줄 때나 시간이 날 때,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그 책 읽어 보니까 어떤 게 좋았는지 묻고 하는 식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부담 없이 나누는 편이에요.”
본인이 요즘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에 맛을 들여 읽다보니 아이들에게도 읽히면 좋겠다 싶어서 사서삼경이니 명심보감이니 고전을 몇 권 사서 안기며 권했더니, 아이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하는 000 씨. 그도 어쩔 수 없이 자식에 관해서는 끝없이 채워주고 싶은 욕심 많은 아버지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책은 때가 있는 법, 두 사람은 부모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때가 되면 아이들은 또 이만큼 자라서 스스로 그 책을 찾아 손에 들 것이다. 지금은 도서관에서 골라온, 저희들이 읽고 싶은 책을 읽게 두는 것도 좋은 일이다.
두 사람도 각자 골라온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2009년 『안동』 제121호 3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