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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Sep 28. 2024

9화. 엄마의 유산

  2017년에 엄마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나갔다.


  비록 요양원에 계셔도 우리 곁에 엄마가 있다는 것과 엄마가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히 달랐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살아계셔서 그것이 큰 은혜인 줄을 미처 몰랐다. 나중에 친구들을 보니 정말로 네 분의 얼굴을 다 뵙지도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물론 아직 엄마의 발 뒷꿈치도 따라가기 힘들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가 살아오신 여자로서의 일생을 이제 조금씩 느끼고 알게 되었다.


  옛날 흑백사진 속에 엄마가 소나무 옆에서 머리를 땋아서 옆으로 내리고 이모들과 찍은 사진이 있었다. 풍산면 단호 마을에 11남매 중 셋째 딸, 엄마 말로는 어릴 때 별명이 애기부처라고 하셨다. 그 때도 엄마는 이미 부처처럼 성품이 덕스럽고 넉넉하셨나보다.

오빠 결혼식 때 사진을 보면 엄마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고 예쁘고 고우셨다.     

79년 고 2때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나는 어른들과 이별하기 시작했다. 85년 첫 발령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결혼 후 36년 동안 시아버님, 시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 아버지, 시할머님,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세효당 한의원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참외를 드시고 이틀 설사를 하시고 깨끗하게 주무시 듯 돌아가셨다. 마당에서 어른들 사이로 지켜보았는데, 염을 하는 모습을 처음보아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를 깨끗이 닦고 삼베 끈으로 온 몸을 꽁꽁 묶고, 코와 입 귀를 막고 수의로 갈아 입히시고 관에 넣으셨다. 어린 마음에 친지 어르신이 너무 세게 묶으셔서 ‘할아버지께서 엄청 아프실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3년 상을 했다. 사랑방에 하얀색 휘장을 치고 제사상을 차리고 아침 저녁으로 아버지가 문안 드렸다. 매달 삭망(초하루와보름) 한 달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고,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차려 드렸다. 고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 생활관 실습 때 부모님을 모시고 절을 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다른 엄마들은 알록달록 고운 한복을 입었는데 엄마는 상 중이라 하얀색 상복을 입고 계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참외를 평생 안 드셨고 말년에는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셔서 엄마가 시중을 드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손도 많이 가고 값 비싼 찹쌀 미역국과 잘게 썬 문어, 명태 보푸라기가 할머니의 애호반찬이었다. 평소에 나랑 같이 주무시는데 돌아가시는 날 밤에 숨이 차 오르고 꺼지고 이상해서 아버지를 깨웠다. 임종을 아버지가 지켜보셨고 일년 상을 집에서 치르고 탈상을 했다. 역시 매달 두 번의 제사와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차려서 높다란 제사상에 올렸다. 그 당시 대부분 장례를 7일장 정도는 했고 엄마처럼 3년상을, 1년상을 집에서 하는 집도 드물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도 엄마가 95세가 넘도록 문안을 자주 드려서 어릴 때 당북동 외가, 말년에 무릉의  단독주택을 엄마 따라 간 기억이 난다. 시댁의 맏며느리로서 5명의 시동생과 시누이, 양가 고모님 세분도 출가 시키셨고, 막내 삼촌, 사촌들도 집안 기숙시키며 공부할 때 뒷바라지를 하셨다. 정말로 집안 일,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나는 정말로 철이 없었다. 엄마는 슈퍼우먼인 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여서 “엄마”라고 부르면 달려와 주시고 안아 주시는 줄 알았다. 배드민턴도 나보다 잘 치시고, 막내를 업고 걸으셔도 가방만 든 나보다 빠르시고 항상 나보다 뭐든지 잘 하시고 빠른 시간에 척척 요리까지 잘 해내는, 언제까지 슈퍼엄마인 줄 알았다. 

엄마도 소녀시절이 있었고 처음 결혼했고, 처음 부모가 되었고, 처음 할머니가 되었고, 늙어서도 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엄마도 외할머니가 무척 많이 보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새로 지은 빨간 벽돌 양옥집 주방에서 엄마가 요리할 때 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시원한 날씨에도 선풍기를 머리 위에 한 대, 발 아래 한 대를 모두 켜길래 “엄마 나는 춥데이!” 하면서 탁 꺼 버리는 못된 딸이었다. 대가 안 깨끗하다고 유난떨었던 내가, 안경 안 쓰면 바닥의 머리카락이 안 보인다는 것을 나이 들어 환갑을 넘기고야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그렇게 더웠던 이유는 온 몸에 시도 때도 없이 땀이 나는 갱년기 때문이란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해부터 정말로 우리는 엄마가 자유롭게 친구들 만나고 계 모임도 하시고 즐겁게 잘 사실 줄 알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당에서 만나니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이 얼마나 엄마를 힘들게 했는지 미처 몰랐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셔도 

“오늘은 오징어 볶아 오너라. 고등어 구어 오너라 ”라며 귀찮게 하셨지만 그것이 엄마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란 것도 미처 몰랐다.      

가끔씩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한 달도 계시고 일주일도 계셨다.          

첫째는 고등학교 1학년, 둘째는 중학교 1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녔고 나는 처음 근무하는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집에 오면 피곤한데 아이들이 매달리는 것을 보면 엄마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지, 조금 계시다 신안동 집에 가실 때 붙잡지를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매일 혼자 계시니 대강 잡수시고 이야기 할 사람도 없고 엄마가 그렇게 빨리 요양원에 가시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엄마 복이 많았다


  언니들은 첫 발령을 멀리 받아서 한 명씩 이불이랑 전기밥솥을 사 보내며 엄마랑 떨어져 살았지만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을 A중학교로 받아서 속옷 한번 세탁 안하고 엄마 밥을 제일 오래도록 잘 얻어먹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 첫째는 시어머님이, 둘째는 엄마가 돌봐 주셨으며, 막내는 오전 오후로 두 분이 번갈아가며 돌봐 주셨다. 그 두 분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이 직장생활을 오래도록 할 수 있었으랴!    

      

  엄마가 자주 하신 말씀이 

“어른들에게 잘 하면 너 자식이 잘 된단다.”

딸 셋을 모두 교직에 보내고 엄마가 제사랑 집안 일 많은 맏아들이 부담스럽다며 장남 아닌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물론 엄마 뜻대로 딸들은 장남이 아닌 사람과 결혼했지만 공교롭게도 세 딸 모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엄마 덕분에 그 후광으로 큰오빠, 작은 오빠, 큰언니 후손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합격했다.      

  엄마는 때때로 용감하셨고 나를 항상 믿어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어슴프레한 새벽 무렵, 밥 냄새와 함께 들리는 엄마의 기도소리. 왠지 모르지만 마음이 든든해지고 뭐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학교 신문사 편집장 하며 밤 늦게까지 취재 다닐 때에도, 초임 시절 교육악법 서명해서 아버지 주례교수님까지 협박에 시달릴 때에도 엄마는 나를 끝까지 믿어주셨다.

아버지는 “너가 이제 공직에 나왔으니 처신을 잘 해야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엄마는 “너가 생각해서 옳은 일이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밀고 나가거라.”하시며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엄마는 안동병원에 입원 하시고 19일만에 열반하셨다.

8월 4일 그 날 아침 산소 포화도가 조금씩 내려갔지만 오빠들이나 동생을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이틀 전에 오빠, 동생, 언니가 다녀갔고 연락도 안 했는데 기적처럼 외삼촌들 막내 이모까지 병원으로 찾아오셔서 반가운 얼굴 모두 만나셨다.  2주 동안 각종 검사와 진료로 거의 파김치가 되었고 의사선생님이 무조건 금식이라고 하지만 입 마른 것을 못 보겠다며 남편이 

“장모님께 물 드려라.”라고 해서 물을 거즈에 적셔서 드리니 고개를 옆으로 저으셨다.     

그 전 주 일요일 엄마 친구 분이 오셔서 귀에 대고 뭐라고 말씀하시니 친구 손을 잡아서 엄마 가슴에 얹어 놓더라고 나중에 나에게 알려 주셨다. 비록 의식이 없어서 음식도 못 드시고 말씀도 못 하시지만 분명히 들으실꺼라고 믿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말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우리를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우리를 많이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는 정말로 위대하고 열심히, 

정말로 열심히 잘 사셨어요!

엄마! 우리 모두는 엄마를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엄마! 우리 걱정은 마세요. 우리는 다 잘 될 거예요.     

엄마! 

나는 엄마 딸로 태어나서 정말로 행복했어요.”    

      

  엄마 귀에 대고 말씀드리고 나서

“엄마 저녁 잠깐 차려주고 올게요.” 라고 말하며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집에 도착해서 채 5분도 안되어 큰형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로 자는 듯이 깨끗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일평생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봉양하셨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도 지극정성이셨던 우리 엄마! 

한결같은 신심으로 덕스러움과 따뜻함으로 모두를 감동시킨 깊고 수양력 높으신 우리 엄마!

소리 지르고 매질 한번 안 하시고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온유하게 미소짓는 우리 엄마!

좁은 집에서 우리 6남매, 삼촌, 사촌 오빠들 모두를 큰 사랑으로 감싸주셨던 우리 엄마!

제일 늦게 주무시고 제일 일찍 일어나셔서 그 많은 도시락과 밥을 챙겨 주시며 일평생 새벽기도와 저녁기도를 정성껏 하셨던 우리 엄마!


살아생전 평소에           

“다음 생에는 신심 깊은 성직자가 되거나 멋진 전문직 여성이 되겠다.”고 늘 말씀 하셨다.      


엄마! 다음 생에는 서원대로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엄마! 많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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