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신문에 ‘대우 대학생 아르바이트 1기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았다. 그 당시 대우전자는 엄청 인기 있는 회사로 나는 ‘이거야말로 나를 위한 기회’로 생각되어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집은 국립대 아니면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고 입학금만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면 각자 알아서 장학금을 타던, 과외 알바를 하던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위에 오빠들, 언니들 그런 식으로 학교를 다녔고 막내 남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응모원서를 내고 찾아가니 경쟁이 치열하였다. 내가 입학한 81년도에는 본고사가 폐지되고 학력고사가 실시되었다. 동시에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며 학과 정원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단정한 옷을 입고, 면접에서 “나는 꼭 하고 싶고 꼭 해야만 한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운 좋게 합격되어 업무를 배정받았다. 아르바이트생들이 해야 할 일은 2주 동안 고객카드를 100장 작성하는 일이었다. 집집마다 찾아가서 이름과 그 집 형편, 즉 다음에 필요한 전자제품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작성하는 것이었다. 첫 날 용상 주공 1아파트를 찾아가서 겨우 오전에 열 집, 오후에 열 집 거의 스무 집을 하니 해가 저물었다.
그 당시 나는 학교 신문사 기자를 하고 있었는데 주말까지 선배가 시킨 특집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내 계획으로 최소한 수요일까지 아르바이트 일을 끝내고, 목요일 도서관 가서 조사하고 금요일 찾아가서 묻고 인터뷰해서 토요일 오후까지 원고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후배 한 명에게 미리 설명을 해 주고 다음 날 용상 2주공아파트를 함께 찾아다녔다. 나중에 건설한 2주공 아파트가 평수도 더 크고 쾌적한 환경이어서 그곳으로 갔다.
지금은 아예 문도 안 열어 주지만 그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이 기특하다며 반갑게 문을 열어주며 음료수를 주는 집도 있었다.
일단 벨을 누르고 “누구세요?”라고 사람이 나오면 무조건 최대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저는 대우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입니다.”
회사에서 만들어 준 명찰을 보여주고 집을 쓱 훑어보며
“ 우와! 집이 멋지네요. 냉장고도 있네요. 우리가 댁에 꼭 필요한 정보를 주고 다음 제품 만들 때 고객님의 의견을 최대한 참고하고 싶으니 조금만 협조해 주실래요?”
라며 나는 계속 말을 붙이고 후배는 조사 항목에 그 집에 있는 전자 제품을 빨리빨리 체크를 하였다.
그래서 오전에 스무 집 거의 내가 혼자 할 때 보다 배로 할 수 있었다, 오후에도 대략 스무 집, 그 다음 수요일도 후배랑 둘이 점심은 떡볶이로 대충 먹고
“우리 이제 뻔치가 늘었네.”
웃으며 오전 오후 합쳐서 마흔 집을 채우고
“딱 맞게 하면 실력 없다고 해. 조금만 더 해서 두 집을 더 채우자!”
라고 달래서 겨우 102집의 고객카드를 모두 채웠다.
해가 저물어 가지만 부리나케 달려가서 지점장님께 사흘만에 102장의 고객카드를 제출하니 무척 놀라시는 눈치였다. (그 다음 해 겨울방학 때 대학생 2기 아르바이트에도 지점장님이 일부러 전화해서 하라고 추천해 주셨음)
2주일 후 마지막 날 수당이 지급되었는데 대학생 용돈으로는 엄청 거금이었다. 후배에게 수고비를 주고 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멀리 여행을 할까? 식구들 언니들 옷도 사주고 광을 내어볼까? 책을 왕창 살까?’ 이리 저리 행복한 상상과 고민을 하다가 할배, 할매 모시고 살며 추운 겨울에 한복을 손빨래 하시는 엄마가 눈에 띄었다. ‘아! 엄마는 이 추운 겨울에 얼마나 손이 시릴까?’ 그 많은 식구들 속에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을 먼저 하고 항상 빨래를 하시고 계셨다. 철이 들며 속옷 빨래를 했지만 그 전에는 양말 한컬례 내 손으로 세탁한 적이 없었다.
‘ 그래! 바로 저거야!’
나는 눈 딱 감고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대우 세탁기를 샀다. 대리점에서는 대우 1기 아르바이트 학생이라고 말하니 할인도 해 주셨다. 엄마는 마당에 벽돌로 지어진 욕실 안에 세탁기를 두고 손님이 올 때마다
“이게 우리 딸이 대우에서 일하고 산 세탁기다.”
라고 자랑하시며 세탁기에 덮개를 씌우고 매일 깨끗이 닦으셨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내 자부심은 하늘로 치솟았다.
오래 된 옛날 세탁기만 보면 ‘최고 일류 대우’ 로고와 함께 간판도 생각나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책을 쓴 김우중 회장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