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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Oct 17. 2022

오늘의 달리기

내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


10km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리기 성공~!!


10월 15일 토요일 오전 8시, 국제연맹 런페스타 참가를 위해 뚝섬 유원지에 도착해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문구를 먼저 써 두었다. 10km는 달리기 힘들면 걸어서라도 완주 가능한 거리이다. 오늘 내 목표는 걷는 구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자체 경품도 걸었다. 새 러닝화다. 오늘 실패한다면 8년 전에 살 때는 예뻐 보였으나 지금은 촌스런 핫핑크 러닝화를 계속 신어야 한다.


달리기 시작 시간인 9시까지 시간이 남아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보았다. 오늘 대회는 9월에 갔던 해양 마라톤 대회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참가인원이 훨씬 적었다. 하프코스 참가 번호표를 달고 계신 어르신이 내게 사진을 부탁했다. 마침 심심하던 차에 나는 사진을 찍어 드린 후 옆에서 같이 확인까지 했다.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와서 반대 방향에 서 보시라 하고 몇 장을 더 찍어드렸다. 실물보다 잘 생기게 나왔다며 좋아하시는 모습에 나도 함께 웃었다. 저분 나이가 되어서도 달리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년엔 나도 하프코스에 도전해 보리라 다짐했다.


노란 풍선을 달고 준비운동을 하는 페이스 메이커가 몇 명 보였다. 오늘은 노란 풍선을 따라 달려볼까?

페이스 메이커 :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기나 자전거 경기 따위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를 말한다. 또 다른 뜻으로 전극을 심장에 장치하여 주기적인 전기 자극으로 심장을 수축시킴으로써, 심장의 박동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장치를 뜻하기도 한다. ( 출처 : 네이버 어학사전 )


아니다. 오늘  페이스 메이커는 나다. 기준이 되는 속도는 무시할 것이고, 내 심장소리에 귀 기울이며 편안한 상태로 달릴 것이다.


9시, 드디어 달리기가 시작됐다. 서두르지 않고 첫발을 내디뎠다. 오늘 날씨가 정말 화창하다. 달리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날씨이다. 햇살이 따가웠다. 모자를 쓰지 않은 걸 후회했다. 지난번 대회 때는 날씨가 흐려서 좋았었다. 조금 달리다 보니 오르막길이다. 잠시 후 또 오르막길이 나왔다. 초반부터 힘겨웠다. 지난번 대회 때는 거의 평지여서 편안했었다... 지난번 대회 때는...


써니, 정신 차려!
오늘은 오늘의 달리기를 해야지!


오른편으로 눈을 돌려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에 햇살을 받은 윤슬이 나를 응원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파랑 하늘도 나에게 힘내라 외치는 듯했다. 과거로의 달리기는 그만두고, 오늘의 달리기를 하자! 내가 달리는 길의 풍경과 내 심장소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힘들면 조금 속도를 늦추고 편해지면 조금 속도를 올리며 내게 맞는 속도를 찾아 달렸다.

 

오늘 달리기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은 반환점을 만났을 때였다. 5km, 벌써 절반이나 달렸다니! 웃음이 나왔다. 그때부터는 웃으면서 달렸다. 길가에 코스모스를 보니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길가에 코스모스 얼~굴'이라는 동요 가사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지금 내 얼굴이 코스모스보다 더 빨갛게 익었을 것이다. 6km를 넘어서자 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7.5km 지점 식수대가 보였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물을 들이켜고 컵을 옆에 탁 던지고 달려보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마라토너들은 다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달리며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반은 흘리고 겨우 입안으로 들어간 한 모금에 사레가 들렸다. 캑캑 거리며 달리다가 이런 내 모습이 우스워 킥킥 거리며 달렸다.


출발 1km 지점을 지날 때 방향 안내하던 분들을 다시 만났다. 9km 지점이 된 것이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분들께 "수고 많으세요~"라고 했더니 지휘봉을 흔들며 "파이팅~"을 외쳐 주셨다. 조금 더 가니 출발점, 아니 도착점이 보였다. 아직 기운이 많이 남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양팔을 쫙 펼치고 도착점을 찍을 때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엄마 몇 등 했어?"

집에 들어서자마자 귀여운 매니저가 물었다.

"1등"

"정말?"

"아니, 엄마보다 빠른 사람이 엄청 많아서 몇 등인지 몰라. 하지만 엄마가 지금까지 달린 것 중에 최고로 잘 달렸어. 아마 오늘 1등 한 사람보다 엄마가 더 기분 좋을걸?"

아홉 살 매니저는 1등이 아닌데 1등 보다 기분이 좋다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엄마, 오늘 토요일이니까 훈련하는 날인 거 알지?"

"오늘은 10km나  달려서 훈련하면 안 돼. 무리하면 다칠 수 있거든."

"그래? 그럼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지."

자상한 매니저가 나를 침대에 눕히고 방문을 닫았다. 둘째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소리를 질렀다.

"안방에 들어가면 안 돼~. 엄마 쉬어야 돼. 들어가지 마~."

까칠한 매니저 덕에 꿀잠을 잤다. 자체 경품을 받으러 백화점에 갔다. 물건을 살 때 늘 가격 확인이 우선이었는데 오늘은 가격표를 보지 않고 마음에 드는 러닝화를 골랐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5분 이상 달리지 못했다. 조금씩 시간을 늘리며 더운 날도, 피곤한 날도 달리기 연습을 했다. 달리기를 하면 생각이 비워지고 오직 내 몸상태에만 집중하게 된다. 달리기가 재미있어졌다. 지난달에 처음 5km 대회에 나갔었고 이번에 두 번째 대회 참가였다.


오늘 내 기록은 1시간 7분 25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두 달 전에 5분 달리기가 힘들던 내가 1시간 넘게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됐다. 기적이다. 두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이루어졌으니 이건 기적이 분명하다. 두 달간 난 그저 묵묵히 그날의 달리기에 집중했고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기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변화를 기대하며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기적이란 밖에서 무엇인가 변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변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에 스스로 연민하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기적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현재만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생텍쥐페리가 이집트 사막에 불시착해 갈증으로 죽어갈 무렵, 동료 프레보가 파편들 속에서 기적적으로 남아 있던 오렌지 하나를 나눠 먹으며 감격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적이란 사소한 오렌지 반쪽에서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출처: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 미디어숲 장재형 지음, 14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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